‘백일의 낭군님’ 대본집 리뷰
대본집 리뷰를 시작하고 더 많은 대본집을 찾아 헤맸다. 집에 있는 책장은 넘쳐나기도 하고, 수시로 읽고 싶어 전자책으로 출간된 녀석들 위주로 찾아봤다. 전자책값이 저렴하기도 하고, 시청률도 꽤 높았던 드라마라 ‘백일의 낭군님’을 구매해서 펼쳐 들었다.
내용은 참 단순했다. 반정으로 아버지를 잃고 겨우 목숨을 구해 양인으로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 연홍심(원래 이름은 윤이서), 반정으로 왕이 된 아버지 밑에서 세자가 되어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 율. 율은 세자빈이 외도를 통해 혼외자를 임신한 것을 알고, 이를 빌미로 그녀와 그녀의 아비인 좌의정을 몰아내고자 한다. 이를 눈치챈 좌의정이 율을 죽이려 하고, 율은 그만 부상을 입고 기억 소실증(주: 현대어로 기억상실)에 걸린 채, 홍심이의 양아버지 연 씨에게 발견된다.
이서는 홍심이란 이름으로 연 씨 밑에서 양인으로 살아가는 중이었다. 다만 결혼을 미룬 채, 원녀(怨女. 스무 살이 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한 여성. 노처녀.)가 되어 생계를 꾸리는 중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 세자인 율이 전국에 모든 원녀와 광부(曠夫. 노총각.)는 혼인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홍심이는 예순이 넘은 박 영감의 첩실이 될지, 장 1백 대를 맞아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부상을 당하고 기억을 잃은 율을 연 씨가 ‘원득이’란 인물로 만들어 홍심이와 결혼을 시키며 벌어지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온갖 클리셰들이 어우러져 갖가지 맛을 내는 비빔밥 같았다. 재료들 고유의 맛이 살이 있는 비빔밥이 아니라, 좀 뒤죽박죽인 맛의 비빔밥. 퓨전이란 말 뒤에 숨다 보니, 중간중간 현대극에서나 나올법한 말투나, 유행어들이 들어있는데, 꼭 그 옛날 귀여니가 쓴 인터넷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대본으로는 좀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라 주인공에 빙의(?) 되어 자꾸 마음속으로 외치게 됐다. 나만 불편한가?
대본집을 보다가 중간에 영상을 찾아봤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제법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랬다. 대본보다 영상이 그나마 나았다. 그런데, 또 나만 불편한가의 마법이 시작됐다. 아니, 왜 어깨가 갓 안쪽에서 떨어지는 거지? 한복선이 저렇게 목에서 한 뼘도 채 안 되는 곳에서 미끈하게 떨어지는 건 뭐지? 나만 불편해, 나만?
영상을 보는데 자꾸만 누군가의 어깨로만 시선이 가기 시작하니, 집중이 어려웠다. 목소리도 연기도 너무 좋은데, 배우들 간의 연기합도 영상도 참 괜찮은데 말이다. 그 불편함에 영상을 보다가 그만 포기해 버렸다.
여태까지 내가 리뷰를 쓴 대본집 중에 시청률이 가장 높았던 작품이니, 어쩌면 진짜 나만 불편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취향이 지나치게 매니악할지도. 다만, 대사나 대본의 구성이 좀 더 짜임새 있게 흘러갔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무릇 대본이란 것이 배우들의 연기와 영상, 연출, 배경음악, 편집 등이 만나서 이뤄지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너무 완벽한 대본도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치명적이지만, 지나치게 구멍이 숭숭 뚫린 대본도 드라마로 되었을 때, 다소 난감하단 걸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었다.
대본만으로 너무 완벽한 작품과 대본만으로는 너무 부족했던 작품을 연달아 읽고 나니, 그 자리에 맞는, 본분에 맞는 삶을 사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자인 율이 기억을 잃고 원득이가 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세자일 때는 완벽했던 그가, 원득이가 되자, ‘아쓰남(아무짝에도 쓰잘데기라고는 없는 남정네. 대본.)’이 된 것처럼, 각자 자기 자리에 맞게, 자기 본질에 맞는 옷을 입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분에 넘쳐서도, 너무 부족해서도 안 되는 그런 삶 말이다. 아쓰녀(아무 짝에도 쓰잘데기라고는 없는 여인네)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쓰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