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땐 나팔꽃처럼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경기를 흔히 동계올림픽의 꽃이라 부른다. 피겨스케이팅 경기 자체가 그렇지만, 특히나 여자 싱글 경기는 스포츠 경기를 본다는 느낌보다는 한 편의 공연 혹은 작품을 본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스케이터의 아름다운 몸짓과 연기, 흘러나오는 음악과 의상과의 조화, 그리고 그 안에서 수행되는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공연 말이다.
요 며칠,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름이 있다. 역대급 천재 스케이터로 불리는 발리예바 선수. 시니어 데뷔 이후 세계 신기록을 10번이나 경신했으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떼놓은 당상으로 여겨지던 선수의 이름이다. 대회 초반 열린 피겨 올림픽 단체전에서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주며, 러시아 올림픽 선수단에 금메달을 안겨준 선수지만, 현재 도핑 양성반응으로 인해 단체전 시상식을 무산시키고, 싱글 경기 출전이 미지수였던 선수다.
그녀는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개인전에 참가할 수 있었고, 15일 저녁 여자 싱글 경기에서 현재 쇼트 프로그램으로만 봤을 때 1위를 달리고 있다. 그 경기를 다시 보기로 보면서 참 마음이 무거웠다. 도핑 파문만 없었다면 정말 아름다운 경기였고, 작은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워낙 프로그램의 난이도나 기술 수행능력이 뛰어난 선수다 보니, 그녀의 경기를 그저 감상 모드로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경기장에 발을 내디디고, 경기를 진행하는 자체가 이미 ‘공정성’을 상실한,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이기에 우리 모두의 마음은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피겨 경기가 동계올림픽의 꽃이라면, 그녀가 경기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 꽃은 바닥에 떨어져 짓이겨진 목련꽃이 되어 버렸다. 도저히 깨끗하고 고아한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누렇게 변하고 짓이겨져 마구 더럽혀진 모습 말이다.
IOC는 그녀가 프리 컷을 통과한다면, 24명의 선수가 아닌 25명의 선수를 프리 경기에 출전시키겠다고 단언했다. 게다가 그녀가 만약 3위 안에 입상하여 메달을 따게 된다면, 시상식을 열지 않을 거라 못 박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경기에 나섰고, 심하게 기울어진 판 위에 서서 경기를 한 선수들은 감출 수 없는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원래 피겨라는 종목 자체가 심판의 채점에 의해 순위가 결정되기에 언제나 판정 논란이 있었다. 그러한 판정 논란 속에서도 최고의 점수를 받기 위해, 선수들은 늘 작은 실수 하나 없는 완벽한 경기, 소위 ‘클린’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매 경기를 ‘클린’으로 끝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을 선수들의 땀과 노력이 그녀가 경기장에 등장한 순간, 어쩐지 물거품이 되어버린 거 같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경기를 지켜보기 전, 방탄소년단의 ‘Magic shop’이란 곡을 듣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필 땐 장미꽃처럼
흩날릴 땐 벚꽃처럼
질 땐 나팔꽃처럼
아름다운 그 순간처럼
항상 최고가 되고 싶어
그래서 조급했고 늘 초조했어
남들과 비교는 일상이 돼버렸고
무기였던 내 욕심은 되려 날
옥죄고 또 목줄이 됐어
그런데 말야 돌이켜보니
사실은 말야 나
최고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닌 것만 같아
위로와 감동이 되고 싶었었던 나
그대의 슬픔, 아픔
거둬가고 싶어 나
‘방탄소년단의 Magic shop 中’
부디, 피겨가 필 땐 장미꽃처럼, 흩날릴 땐 벚꽃처럼, 질 땐 나팔꽃처럼 깨끗하고 고아한 품위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한 편의 작품, 공연을 보는 것 같아도, 결국 지금 그들은 스포츠를 하고 있으며,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이다. 최고가 되기보단,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 그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