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전거 탄 달팽이 Sep 15. 2023

매일 마주하는 너희

홍범도들에게


안녕, 얘들아! 너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야. 가을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 계절에 문득 너희들에게 펜을 들어 편지를 써 본다. 방학 동안 고향에 다녀온 친구들이 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방학의 여운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너희들을 보며, 얼른 가을이란 녀석이 다가와서 우리에게 여름 방학은 끝났다는 사실을 일러주기를 선생님은 바라고 있단다.


   그렇게 가을이 성큼 다가와 가을이 무르익어 갈 때쯤 한국어 학급 선생님들은 너희들을 위해 멋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단다. 이름도 멋진 ‘보훈 사적지 탐방’이야. 부제는 ‘고려인들의 뿌리를 찾아서’이고. 어때,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니? 너희들이 지난 1학기에 갔던 ‘고궁 체험’을 가장 재미있던 활동으로 뽑았다고 들었어. 그러니, 이번 탐방도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즐겁고 재미있는 활동이 될 거라 선생님은 확신한단다. 특히 고려인인 너희들에게는 이보다 유익한 시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멋진 시간이 될 거야.


   그런 멋진 시간을 앞두고 선생님은 먼저 너희들 앞에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단 말을 먼저 해야겠어. 미안하다, 얘들아. 이 펜을 든 건, 너희들에게 정말 너무 많이 미안해서이기도 해.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그밖에 터무니없는 이유로, 너희들이, 너희의 부모님들이, 그 옛날 너희들의 나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분들에게 선생님은 그저 죄송하단 말밖에 할 수가 없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면면을 따지기에도 참 버거운 나날들이구나.


   그러나 여전히 너희들은 내게 홍범도들이야. 나라를 위해,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생을 마감하신 홍범도 장군님의 후예들. 너희의 몸에 비록 한국인의 피가 25%밖에 흐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의 흔적을 애써 부정하며 지우려는 그 누군가가 있더라도 너희는 여전히 그분들의 후예라는 걸 잊지 마. 그리고 홍범도 장군님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한 독립운동가이자 장군님이란 사실을 말이지.


   그러니 우리 이번 여행을 제대로 즐겨 보자. 9월 말에는 여행을 가기 전에 ‘고려인 이주의 역사’에 대해 짧게나마 이야기를 들을 거야. 그날, 너희가 살고 있는 동네로 가게 되었어. 일단,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기도 하고, 고려인들의 음식이기도 해서 ‘국시’를 먹는 일정도 살짝 넣어 보았는데, 너희들은 어떠니?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고려인들의 음식을 먹으며, 고려인인 너희들과 그날 나누게 될 이야기는 무엇일까? 일단 먼저, 너희에게 미안하단 말부터 전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이야기가 풍성하기를 선생님은 기도해 본다.


   그리고 여행하는 그날, 우리는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고 해. 그러면서 너희들의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였을지도 모를 분들의 삶에 대해서도 나눠보려고 한단다. 그전에 혹여 가능하다면 할머니, 할아버지께 아는 이야기를 듣고 와도 좋아. 너희뿐 아니라, 그날은 다른 한국 친구들도 초대했거든. 그 친구들에게 너희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면, 우리 모두에게 조금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라 선생님은 확신한단다.


   선생님은 그저 바라고 있어. 비록 지금처럼 가을이 오지 않을 것 같고, 어쩌면 가을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나날들이 계속될지라도 분명 가을은 어느샌가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라고. 그 계절의 발걸음처럼 언젠가 지금의 이 소요가 지나고 다시 본래의 상태로 모든 것이 돌아가기를 말이지.


   그러니 우리 모두 잊지 말자. 특히 지금은 우리가 홍범도들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꺼려질지 모를지라도 잊지 말자. 잊지 않고 우리가 계속 그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을 곱씹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다시 완연한 가을을 마주하듯, 그렇게 찬란하고도 빛나는 역사 앞에 서 있을 거야. 선생님은 그렇게 바라고 믿는다.


   너희들과 함께 할 여행을 그리며 이만 편지를 마칠까 해. 긴 글 읽느라 고생 많았어. 이 긴 글이 그저 선생님의 눈빛과 말투에서 배어나기를 바라곤 한다. 그럼, 내일 또 수업 시간에 만나자. 안녕.


                                             2023년. 9월 15일 금요일.

                                                             매일 너희들을, 너희 홍범도들을 마주할 수 있어서 감사한 선생님이.    


#쓰고뱉다

#100일의글쓰기시즌2

#열한번째

#Ah-choo(아주)_잘쓰조

#홍범도장군_독립군_독립운동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아이는 사춘기가 조금 심한 것뿐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