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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느 한끼

일상의 낭만 바르기

과거의 한 끼_크림치즈 베이글과 아이스 바닐라 라테

by 여느진

2019년 11월 7일, 오후 1시 3분


새벽녘, 잔뜩 취해 우스꽝스러운 주정을 부리는 동생의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깔깔대다가 잘 준비를 하기 위해 침대에 눕자 방금 전까지 내게 머물렀던 웃음이 서서히 걷혔다. 너무 힘들어!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 이런 슬픔과 고난은 아니지만,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머리를 꽉 채웠다. 그리고 문득 바다에 가고 싶어 졌다.


다행히도 한 시간 정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얼마든지 바다에 갈 수 있는 지역. 가족들과 비빔밥을 비벼먹으며 바다를 다녀올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동생은 누나 안에 있는 것들이 바다만큼의 물이 필요할 정도로 큰 거냐고 놀리듯 말하면서도 다녀오라고 말해줬다. 엄마도 고민 한 점 없이 맑게 다녀와~!라고 외쳤다. 용기가 생겼다. 미루고 미뤘던 치과를 가기 전에 호들갑 떨며 카메라도 충전하고 무얼 입을지 고민도 하고 삼각대도 챙기고 혹시나 카페에 갈 여유를 대비해 필사할 노트와 펜까지 챙겼다. 이제는 제법 내 발에 맞게 익은 새 신발까지 신었다. 추가로 주문한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도 도착했는데, 앨범을 열어볼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만큼 나 혼자 바다에 간다는 사실이 주는 설렘이 컸다.


치과에서 살짝 꾸중을 듣고 나와 중고 서점에 들러 그림책을 두 권 읽었다. 뭐든 될 수 있는 돌멩이라는 그림책과 나는 내가 좋다는 그림책. 나를 위한 나름 즉흥적인 낭만 위에 슈가파우더를 솔솔 뿌려주는 것 같았다. 노을 지는 바다가 보고 싶었지만, 해가 짧아져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혼자 바다까지 걸어가는 길, 귀에서 들리는 노래와 내 머리를 마구 헤집는 바람, 드문드문 박혀있는 하늘 위 별이 좋아서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바다가 철썩이는 소리와 산책하는 연인의 재잘거리는 소리, 우리 엄마 아빠와 비슷한 연세로 보이는 분들이 사진 찍는 소리가 섞인 11월의 어느 저녁.


혼자 기념촬영을 하겠다고 삼각대를 펼쳐 낑낑대는 나를 보고선 지나가던 한 분이 사진 찍어달라 부탁하시지~하며 사진을 찍어주셨다. 껄껄 웃으며 몇 차례 찍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내 영혼이 탈곡되는 중인 듯한 모양새였다. 그것마저 오늘의 낭만. 어두워서 무엇하나 잘 찍히지 않는 바다. 플래시를 터트려 찍은 사진들이 필름 카메라로 찍은 것 같다 생각했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낭만적인 그런 순간들. 어둠과 근처 가게들에서 나오는 빛이 번갈아 나오는 바닷길을 걸으며 새벽녘에 나를 가뒀던 무언가가 물러났다. 조금 급박한 막차 시간에 맞춰 서둘러 가는데, 신발 안으로 모래가 마구 들어왔다. 까끌한 걸음과 함께 돌아가는 길, 이전에 즐겨 듣던 노래를 오랜만에 들었다. 다시 내 일상으로 들어가는 길이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작년 오늘, 나는 출근 전 빈 시간을 채우려 카페를 갔었다. 우리 동네는 아니고, 다른 동네에 있는 카페. 바쁜 틈 사이에 방문해 바닐라 라테와 베이글을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노트북을 정신없이 두드리며 중간중간 진한 바닐라 라테를 한 모금씩 마시고, 크림치즈가 잔뜩 발린 베이글을 한 조각 잘라먹으면 어쩐지 바쁜 도시의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따스한 햇볕이 초록잎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을 중간중간 보기도 했다. 마우스를 쥔 손 위로 퍼지는 햇볕을 맞기도 했다. 그때에 나도 오늘의 나처럼 일상의 낭만을 찾았다. 일과 일 사이에 잠깐씩 즐기는 이런 여유가 내게 큰 힘이 됐었다.


일상의 낭만이 베이글 사이 크림치즈처럼 부드럽게 삶의 틈에 발린다. 퍽퍽한 일상에 은은한 맛을 선물한다. 오늘의 바다도, 작년의 햇볕도, 그리고 앞으로 내가 맞이할 다른 낭만들도 모두 삶의 틈에 채워져 나를 더 버티게 만들어주겠지. 지하철에서 내려 마트에 간다는 엄마의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생각했다. 참 따뜻하다고. 그리고 내게 이런 낭만을 받아들일 힘이 있어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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