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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느 한끼

더 선명한 나에게

오늘의 음료_생맥주

by 여느진

2020년 11월 14일, 오후 6시 13분

처음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강경 소주파였다. 술의 맛을 느끼기엔 아직 어렸고, 술자리를 찾는 건 술 자체보다 취하기 위한 때여서 맥주는 비효율적인 선택이라고 여겼다. 맥주든 소주든 쓴 건 똑같은데, 덜 배부르고 더 빠르게 취하는 건 소주였으니까. 그래서 전 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힘든데, 또 술을 마시고 싶을 때나 맥주를 마셨었다.

그러다 점점 맥주의 청량감에 눈을 뜨게 되고, 내 취향의 맥주를 찾아가며 소주보다 맥주파가 되었다. 물론 제일 좋아하는 건 소맥이지만. 일하기 시작하고 유독 힘든 날에 편의점에 들러 품에 몇 캔 안아 들고 가는 일이 위안이 되는 때가 왔다. 이제 내게 술은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를 위로하는 작은 보상이 되었다.

지금보다 덜 선명했던 예전의 나는 늘 내 감성의 결을 이해해줄 사람을 찾았었다. 누군가의 이해가 내 존재를 입증해줄 수 있는 것처럼. 내 감정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허락받아야 안심했었다. 앙상한 추위를 머금은 계절의 나무를 보고 꼭 하늘을 그려내는 붓 같지 않냐고 말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실망스러워 다시 사람들 앞에서 꺼내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감성의 결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 활자로도,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그때와 똑같은 감성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건물과 달리는 차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별처럼 반짝이는 지금. 내 목에 걸린 목걸이도 반짝인다. 자주 보지는 못해도 늘 집처럼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준 선물. 내 책을 선물하러 갔다가 더 큰 선물을 안고 왔다. 내 취향을, 내 느낌을, 내 감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들. 짧은 시간의 조우였지만 다음 만남까지 나를 나답게 만들어줄 기억들. 특별하고, 비밀스럽고, 소중한.

이후에 우연이 우연을 만들어내 주말의 몇 시간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을 만났다. 심야식당 비슷한 분위기의 가게에 들어갔는데, 생맥주 종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두 가지 생맥주 종류 중에 더 가벼운 느낌을 골라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만큼 내 선택에 확신이 더 생겼다는 증거. 나는 점점 선명해지고 있구나, 속으로 스스로에 대한 감상을 삼켰다.


이제 나는 편의점에서 좋아하는 캔맥주가 뭔지 알고, 쉽게 꺼내들 수 있다. 개중에 끌리는 디자인이 있으면 쉽게 도전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원해서 맥주를 삼켜낼 수 있다.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은 애정에 포장된 사람이었다. 그 애정이 내가 그은 선을 지켜줬고, 내가 더 많은 선을 그릴 수 있게 만들어줬고, 그 선이 빛나게 해 줬다. 그들 덕에 나는 오늘도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내일 더 선명해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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