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진 Mar 30. 2021

얼룩덜룩 슬립온

오늘의눈맞춤

2021년 3월 29일, 오후 5시 42분


 눈을 떴는데 머리가 너무 아팠다. 피로가 차곡차곡 쌓여 머리 위에 잔뜩 얹어졌다. 하품이 쩌억하고 나왔다. 시원한 커피를 단숨에 비워내고 싶었다. 남아있는 콜드 브루 원액이 없었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 밖 모습은 미세먼지로 흐렸다. 흡사 비라도 오는 모양이었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시킨 게 없어 당황하다가 생각해보니 사이즈가 없어 중고로 산 슬립온이 있었다. 직거래를 하기 직전에 깨끗하게 주고 싶어 빨다가 얼룩이 생겼다며 사려던 가격의 반값이라도 원하시면 거래하자고, 죄송하다던 판매자 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고민하다 결국 택배로 받게 된 사연이 있는 그런 슬립온.


 박스에서 꺼낸 신발의 상태가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놀랐다. 맨발을 바로 끼워 넣곤 신나서 방방 거렸다. 흐린 하늘을 보여주는 창문도 닫고, 신발을 핑계로 커피를 사러 나왔다.


 얼룩덜룩한 옆태가 위에서 보니 잘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건 체크무늬뿐. 생각해보면 일상의 흠도 이렇게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 않을 텐데. 너무 작은 흠에 신경 쓰느라 커다란 풍경을 보지 못한 건 아닌가. 계속해서 신발을 바라봤다. 아마 내일도 이 신발을 신고 나가게 되겠지. 신발 속에서 발을 꼼지락거렸다. 밖에서 보면 이 꼼지락 거림도 보이지 않을 테지.


 입에 고인 말들이 많았다. 마음에 고인 감정도 많았다. 결국 크게 보면 보이지 않을. 오늘도 내 전체 인생에서 보면 아무렇지도 않을 그런 작은 얼룩일 텐데. 

 

매거진의 이전글 숨은 그림자 찾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