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진 Apr 12. 2021

잘리고 남은 것들

오늘의 눈 맞춤

2021년 4월 12일, 오전 1시 48분


 안 좋은 감정이 한 번에 밀려와 사람을 질식시킬 때가 있듯이 좋은 감정이 한 번에 밀려와 광대가 아플 정도로 웃게 만드는 때가 있다. 오늘처럼.


 사실 낮까지는 깨끗하지 못한 감정들이 쌓여있었다. 감정의 굴은 한 번 파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내려가기 마련.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나는 감정의 굴까지 파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래도 오목하게 패인 감정의 표면은 걸어가다 넘어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저녁이 다가올 때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플레이리스트에 좋은 노래들이 추가됐다. 새로 배우기 시작한 분야에서 조금 좌절감을 맛보고 있었는데, 좋은 사람들 덕분에 실컷 웃고 의지도 다시 다졌다. 그리고 좋아하는 가수와 관련해 염원하던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오목한 감정한 표면에 행복한 감정들을 채워 넣고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다졌다.


 내일 추가로 책을 입고하기 위해서 꼼꼼하게 내 책들을 확인하고, 초판 특전 스티커들을 잘라냈다. 기쁨을 꾹꾹 눌러 담아 칼질하고, 하나하나 담아낸 뒤 책상 위에 남은 것들이 보였다. 남아있는 것들을, 떨어져 있는 것들을 쉽사리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어쩔 수 없는 습성.


 하얗고 길쭉한 이 잔해들은 기쁨일까 아니면 슬픔일까. 뭐가됐든 지금의 내가 기쁜 건 사실이니까. 기쁘기 위해선 어쨌든 무언가 잘려나가야 하지. 잘리고 남은 것들에 대해 마음이 쓰이는 것은 사실 내 기쁨을 위해 베이는 고통을 감내했을 존재들에 대한 고마움일지도 모른다.


 나름 오랜만에 치킨을 시켰다. 새벽을 좀 더 오래 누리고 싶은 날이니까. 눈떴을 때 피곤함이 남을지라도, 언젠가 그 피곤함마저 잘려나갈 테니까. 지금은 누군가의 고통 위에 지어진 행복을 좀 더 느끼고 싶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노란 위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