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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진 Apr 21. 2021

비겁한 어느 날

오늘의 눈 맞춤

2021년 4월 20일, 오후 9시 49분


 게으른 하루가 또 시작됐다. 망가진 생활 패턴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습관처럼 저녁까지 눈을 감고 있는다. 해야 할 일도 있고, 마주해야 할 일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눈 감는 건 이제 하나의 습관이 됐다. 당연스럽게 어제 내가 자기 전에 다짐했던 요가가 기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도 뭐 어쩔까. 이미 시간은 흘렀고 이 시간의 대가는 내가 치러야 한다.


 하루 종일 숙제를 안 한 기분으로 살았다. 실제로 과제가 남아있지만, 어떻게든 해내리라 믿는다.


 매일 문장을 써내려 가다 보면 가끔 생각이 없어진다. 손가락이 먼저 글자를 엮고, 그 후에 사고가 따라간다. 그렇게 하루가 정리되기도 한다.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렵다.


 오늘은 엄마의 생일이었다. 여러 일이 있었고, 여러 감정이 응축되었지만 결국은 생일상 앞에 내가 앉아 있었다. 동생이 끓인 미역국과, 동생이 사 온 케이크. 내가 굽다가 뒤로 빠진 곱창과 염통, 파를 썰다 매워서 살짝 눈물이 고일 뻔한 파채 무침, 엄마가 퇴근길에 사 온 옛날통닭, 맥주캔 두 개. 위에 올라온 것보다 다른 감정과 다른 문장들이 훨씬 더 많이 상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도 맛있었다.


 유독 4월, 5월에 생일이 몰려있는 것 같다. 누군가의 생을 축하하고 축하받는 일이 신기하기도, 때로 부질없다 느껴지기도,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지기도. 내가 마음을 쏟은 만큼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오늘 마음이 불편한 건 여러 가지 불순물 가득한 감정 때문에. 그리고 알 수 없는 찝찝함 때문에. 차차 해소되리라 믿고 싶다. 기대는 늘 정해진 길 밖으로 흘러가지만.


 그래도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말할 때는 늘 진심을 담는다. 축하한다는 말도. 오늘도 그랬고. 어쩌면 내 생의 시작점이었을 오늘, 어려운 발걸음을 떼줘서 고맙다고. 음성으로 전할 용기는 조금 부족해서 문자로 남기는, 조금 비겁한 어느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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