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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진 Apr 23. 2021

급한 여유로움

오늘의 눈 맞춤

2021년 4월 22일


 하루 종일 마음이 급하고 여유로웠다. 학창 시절, 학부시절 내내 주특기로 삼았던 건 벼락치기. 성인이 되어서도 벼락치기의 달인이 될 줄은 몰랐다. 아니, 달인이라기엔 결과물이 좋진 않으니 벼락치기 애호가 정도가 좋겠다. 어쨌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여유로움과, 시간이 줄어들수록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초조함이 뒤섞여 급한 여유로움이라는 조금은 어색한 결과물이 오늘 하루를 말해준다.


 일어나서부터 새벽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커피를 탄 컵이 계속해서 채워졌다. 몇 잔을 비웠는지 헤아리지도 않았다. 커피 좀 줄여야 하는데. 디카페인 커피와 카페인이 잔뜩 들어간 커피를 번갈아 비워내며 나름의 변명도 했다. 그래도 디카페인 커피도 좀 마셨어, 하고. 당 섭취량 좀 줄여보겠답시고 탄산수를 잔뜩 샀으면서 정작 커피엔 시럽을 잔뜩 넣어 먹는 것과 같은 모순. 그래도 노력한 게 어디야, 라는 중얼거림.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마시기는 싫고 버리기는 아까운 컵이 품고 있는 액체의 높이. 이 높이를 마주하면 오늘이 또 얼마나 흘러갔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보통 하고 있는 일도 이쯤에서 고민하게 된다. 그냥 그만둘까, 아니면 억지로라도 나머지를 끝낼까.


 오늘 내게는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하나는 억지로 끝냈고, 다른 하나는 중도 포기했다. 나머지도 결국 밤을 새워 천천히 마무리하겠지만 어쨌든 마감시간은 지키지 못했다.


 보통 커피가 이 높이일 때 나는 얼음을 더 넣고, 커피를 더 담아낸 뒤 빠르게 마셔버린다. 일에 집중해 또다시 똑같은 높이로 남으면 고민하다 대게는 버려진다. 오늘은 얼음이 담길 예정이고. 포기가 아니라 잠시 쉰 것뿐이라는 뜻이다. 벼락치기가 가져다주는 급한 여유로움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 상태인지.


 흑백으로 보는 커피가 사약 같기도 하다. 어떤 부분에선 맞을지도 모른다. 각성 상태를 비정상적으로 끌어나 쓰는 거니까. 죽으며 살아가는. 급하면서 여유로운. 모순과 모순과 모순.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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