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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진 May 16. 2021

비와 나뭇잎과 나

오늘의 눈 맞춤

2021 5 15, 오후 11 43


 장화를 신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비가 조금만 올 것 같아서 다른 신발을 신고 나왔다. 온 세상이 눅눅한 습기로 가득하고, 조금은 덥기도 한 날. 우산을 넣은 가방은 무겁고 거슬렸다.


 마음속에 짐처럼 남아있던 일을 해결하고 나니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약하게 부슬부슬하게 내리는 비는 신호탄이었다.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했는데,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부러 방문한 가게가 영업을 종료했다. 이런 식으로 자잘한 실수나 안 맞는 일이 종일 이어졌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괜찮았다. 새로 쌓인 좋은 이야기도 많았다.


 문제는 집에 돌아오는 길. 전 날 잠을 거의 못 잤을 때, 아니 그전부터 조금씩 몸집을 불린 부족한 수면의 피로 탓이었는지 버스에서 긴장을 풀고 자버렸다. 내릴 곳에서 꽤 지나고서야 눈을 떴다. 거리가 애매해 택시도 잡히지 않아 30여분을 걸었다.


 걸친 셔츠와 긴 바지가 그새 두터워진 비에 잔뜩 젖고, 피곤한 몸은 무겁고. 짐이 많은 가방은 흘러내리고. 비에 호되게 혼났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게 맞지만, 빗소리와 섞인 노랫소리가 좋았다. 축축하게 젖은 세상과, 나뭇잎들이 좋았다.


 비 오는 날을 정말 싫어했는데, 그리고 누가 봐도 최악의 상황이 맞는데 그 상황에서 좋음이 섞여있다는 게 좋았다. 그걸 발견한 나 자신도.


 여전히 비가 쏟아지는 밖. 또 여전히 잠에 들지 못한 나. 이 속에서 또 좋은 순간이 찾아오겠지, 늘 그랬듯. 비에 젖은 옷가지가 결국은 마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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