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 끼_마라탕
2020년 10월 19일, 오후 7시 16분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하루가 안온하게 흘러갈 것을 직감했다. 이젠 익숙한 알람보다 이른 기상. 이상할 만큼 가볍고 산뜻한 마음과 피곤함이 들러붙지 않은 몸. 이런 날은 모든 움직임이 한 박자씩 느려진다. 엇박이어서 여유로움이 들어올 작은 틈이 생긴다.
지난 주말 나를 밤늦게까지 일하게 만들었던 일의 결과가 좋았다. 사실 새벽까지도 신경 쓰여 잠이 쉽게 오지 않았는데, 깊은 잠과 보람찬 소식이 함께 찾아오다니. 이후로도 사소한 좋은 일이 이어져 하루 종일 발아래 구름 하나를 깔고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버스를 놓쳐 택시를 탄 것조차도 편안한 시작을 위해 의도된 연출 같았다.
나를 처음 마라탕의 세계로 인도해준 동생이 있다. 일로 만나 끊길 듯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져온 웃기고 소중한 인연. 우리 사이에는 대략 5년 정도 되는 시간 차이가 있는데, 함께 있으면 그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즐겁다. 비슷한 관심사의 얘기를 가감 없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 그런가, 모든 대화가 자극적인데 속이 편안하다. 나이에서 벗어나 이런 인연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참 고맙다.
어느 순간 이 동생을 만나면 마라탕을 먹게 된다. 오늘도 마찬가지. 내 마라탕 취향의 70% 이상은 이 동생의 입맛을 빌려왔다. 나는 주로 소고기를 추가하고, 분사를 꼭 넣는다. 숙주는 많이, 청경채도 조금, 푸주는 정말 많이. 단호박은 추가할 수 있으면 하고, 마라탕의 맵기는 꼭 강하게. 팽이버섯도 조금. 이외의 재료들은 그때그때에 따라 달라져도, 앞에 언급한 것들은 챙겨 넣는 편이다. 입이 얼얼해 마비될 때, 씁하- 흡사 욕과 같은 소리를 내면서도 멈출 수 없는 자극적이고 속 풀리는 맛. 비록 쓰린 후폭풍이 돌아올 때도 있지만.
처음엔 강한 향신료 맛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광하는 거지? 의아했는데, 시간이 지난 후 또 이 맛을 떠올리는 나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 자극이 편안하게 느껴지기까지 나는 몇 그릇의 마라탕을 비웠고, 그렇게 어떤 마라탕이 더 진하고 연한지까지 알 게 되었다. 나중엔 배달까지 시켜 먹을 정도로 마라탕을 찾게 됐다. 그니까 나는 편안해질 때까지 자극을 계속 주입했다.
모든 자극은 반복을 거듭하며 끝내 무뎌진다. 자극이 남기고 가는 것들은 대게 쓰라리고 아프지만, 그 사이마다 이어지는 힘에 익숙해져 더 단단해진 틈이 있다. 끊임없이 바쁘고, 스트레스가 가득하고, 불규칙한 생활의 굴레가 자극이라면 오늘의 편안함은 이 자극들 사이에 틈이겠지. 이 틈바구니에 오늘 만난 동생이 있고, 내 사람들이 있고, 보람이 있고, 소소한 행운이 있고, 그렇게 일상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이어진다.
본 목적과 다르게 만나서 각자 하려던 일은 다 못했지만, 만남의 시간도 짧은 편이었지만. 오늘 동생에게서 받은 익숙한 자극은 다른 평온함을 가져오겠지. 잔잔하게 흘러가는 오늘 하루에 맛있는 향신료가 되어준 소중한 인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