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이곳에서는 이대로 이방인으로

by 리엘리

어쩌다 보니 관광비자가 아닌 학생비자를 가지고 외국에 나오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20년 전쯤, 대학교 4학년이 되는 대신, 휴학을 감행했던 스물세 살 때였다. 외국은 처음이었고, 혼자였고, 무려 10개월짜리 계획이었다. 부모님께는 ‘어학연수’를 매우 가고 싶다고 읍소해서 어렵게 얻은 허락이었다. 이제 와서 고백건대, 그것은 어학연수라는 미명 하에 실행한 일종의 안식년이었다. 당시 2년 동안 사귀었던 남자 친구와 이별을 하고, 공부고 뭐고 그 무엇도 싫었던 때다. 장기간의 일탈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동기들이 노량진의 임용고사 학원으로 향할 때, 나는 홀로 런던으로 향했다.


학생 비자로 머물렀던 영국 런던에서의 10개월을 떠올려본다. ‘수시로 다녔던 유럽 여행’, ‘해지지 않는 여름과 흑맥주 기네스’, ‘초록으로 가득한 공원과 템즈강’ 이런 말들로 요약된다. 누가 들어도 낭만적이라고 할 만한 젊은 날 런더너의 회상이다.


그러나 빛나는 기억 저편, 봉인해 놓은 어둠의 영역도 있다. 간단한 것처럼 들리는 ‘점심 도시락’ 준비도 그중 하나다. 요리를 즐기지 않는 나에게 도시락 싸기는 세상 귀찮은 일이었다. 결국, ‘감자 샐러드’ 도시락이 어학원을 다닐 때의 궁여지책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감자를 삶아 으깨서 다섯 등분을 해 작은 통에 각각 담아 냉동실에 넣어 놓았다가 아침마다 들고나갔다. 학창 시절 엄마가 정성으로 싸주셨던 도시락은 그야말로, 하루의 은총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가 싸서 다녀야만 하는 도시락은 삶의 굴레 같기만 했다. 그리고 플랫 생활(하우스 셰어, 룸 셰어) 역시 혼자 온전히 제 방을 쓰던 나에게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늘 있게 마련이었으니까 말이다.


영국에서의 열 달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주말에 런던에서 기차 타고 프랑스 파리로 나들이 갔다 오는 신나는 어학연수생은 빛나는 영역, 도시락 싸서 어학원 다니고, 저녁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청소 일을 해야만 했던 고학생(공부는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은 어둠의 영역인 셈이다. (사람들은 주로 빛의 영역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실로 오랜만에 외국에서의 여행이 아닌 삶이다. 뉴질랜드로 먼저 와서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던 사리씨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사리씨가 자동차, 인터넷, 전기, 은행 업무와 같은 기반도 모두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우리나라의 겨울에 있다가, 뉴질랜드의 여름으로 오니 모든 것이 찬란했다. 동네의 언덕을 내려가 코너를 돌면 나타나는 작은 카페에서 마시는 향기로운 커피, 커피에 스콘을 곁들여 먹고 있자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테이블 건너편 의자 모서리에 앉는 참새들, 차를 타고 10분만 가면 펼쳐지는 고운 모래가 있는 잔잔한 바닷가, 아파트에서 길만 건너면 나타나는 공원의 커다란 나무 그늘과 푸른 잔디밭, 어느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에 넣고 마음에 담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뉴질랜드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의 영역에 감추어 놓았던 런던에서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타국에서 다시 학생이 되었다. 도시락을 싸서 다녀야 한다는 뜻이고, 크지 않은 아파트에서 플랫 메이트들과 물건과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생활비라도 벌자고 파트타임 일도 했다. 도착해서 보았던 낭만적인 언덕길은, 무거운 찬거리를 양손에 들고 걷는 가파른 고행길이 되었다. 오후 두세 시면 문을 닫아버리는 뉴질랜드의 카페 영업시간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나라에 비해 조악하고 비싼 각종 공산품, 높은 장바구니 물가와 외식비는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기쁨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오래전에 ‘교차 문화 적응 이론 (칼레르보 오베르그 Kalervo Oberg, 1901-1973)’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해외에 나가면 초기에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허니문기’를 겪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치며 컬처쇼크에 해당하는 좌절기를 맞닥뜨린다. 그러다가 한두 해가 지나고 언어와 관습에 익숙해지면서 차차 적응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오래전 연구이고 지구 건너편의 소식도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 이 이론을 적용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 이론을 나의 경험에 적용해 본다. 열 달이라는 한정된 시간의 어학연수에서는 허니문기 자체가 길었고,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장소에서 또 다른 허니문을 즐겼다. 좌절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좌절은 대수롭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 분명했고, 그 사회의 일원이 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응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서의 살길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타국으로 삶의 터전을 통째로 옮긴다는 것은 열 달짜리 어학연수와는 매우 다르다. 허니문과 같은 시간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돌아갈 기약도, 돌아갈 장소도 없다는 것은 외로움과 공허함을 불러왔다. 쉽게 좌절했고 회복은 느렸다. 일상의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우아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어떤 부분에서는 적응이 아니라 포기 또는 외면하게 된다. 이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멀리 있는 일, 남은 생을 모두 이곳에서 살아도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 일 같기도 하다.




뉴질랜드에 온 지 어느새 다섯 해와 여섯 달이 지났다. 어찌어찌해서, 레지던트 비자를 받아 생활은 안정되었고 정당한 일을 하고 세금을 내며 살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앞으로 살아가는 데 법적인 문제는 전혀 없다. 문제는 나 자신이다. 이곳에서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늘 나를 따라다닌다.


최근, 유튜브인지 SNS인지는 잘 몰라도 어디선가 스치듯 짧은 영상을 하나 보았다. 동양인의 외모이지만, 자기 조상이 언제 미국에 왔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되어 정체성은 완전한 미국인에게 백인들은 여전히 묻는다.


“Where are you from?”

“I am from Chicago.”

“No, I am asking where you are really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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