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던트 비자를 받기까지, 눈물, 눈물, 눈물.
“우리 중에 약국에서 일하다가 뒤돌아 눈물 안 흘려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퇴근 후 가끔 만나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하소연을 들어주었던 유일한 친구 재이가 했던 말이다. 재이는 뉴질랜드에서 만난 첫 친구이다. 우리는 ‘파머시 테크니션’이 되기 위한 직업교육 과정을 함께 공부했다. 대부분이 20대 젊은이인 동기들에 비하면, 우리 둘은 한참 언니급이자 동갑내기여서 곧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되었다.
정식 파머시 테크니션 자격을 갖추기까지 2년 정도 공부했다. 학습 과정의 시작과 동시에 수습 테크니션으로 약국에서 일을 할 수 있고, 과정을 모두 마치면 정식으로 자격을 갖춘 테크니션이 된다. 약국이나 병원, 제약회사에서 주로 일한다. 나의 경우는 운이 좋아, 학교에서 연결해 준 실무 실습 약국에서, 일을 배우고 차차 근무 시간을 늘려, 과정을 모두 마친 뒤 정직원으로 채용되어 일했었다.
약국에서 근무할 때, 즐겁고 재미있었던 기억은 많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장 많이 떠오르는 기억은 출퇴근 버스 안이다. 아침 출근길 버스 안에서, 전날 새로 알게 된 약의 이름이나 복약 방법, 전화받을 때 할 말들을 한 번씩, 꼭 입으로 중얼중얼해본다. 남들이 보았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심바스타틴은 리펙스, 란타노프로스트는 하이사이트, 다비가트란은 프로닥사.”
“셰이크 웰 앤 유즈 원 투 투 스프레이 인투 이취 노스트릴 쓰리 타임스 데일리.”
“디스 이즈 ○○ 콜링 프롬 유니켐 △△ 파머시.”
“두 유 원트 허 투 콜 유 백 레이터 오어 유 원트 콜 어스 백?”
날마다 긴장하며 ‘오늘은 실수 없이 잘해보자’ 입술을 깨물며 출근했건만, 퇴근길 버스 안에서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소리도 없이 수없이 많은 날 눈물을 훔쳤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손님의 이메일 주소 알파벳을 하나도 못 알아들었던 날, 간단한 업무인데 방법을 몰라 손님 앞에서 쩔쩔매던 날, 다른 직원들이 뒤에서 나를 비웃는 것을 느꼈던 날, 정말 열심히 일하는데 아무도 날 인정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여권 사진을 찍어주거나 이어 피어싱, 복권 판매와 같이 메인 업무 외의 업무가 끝도 없이 나에게 미뤄질 때, 약국의 시프트가 마음에 안 들지만 확 그만둘 수 없을 때, 이유는 그때그때 무궁무진하다.
답답한 날들이 쌓일 때 재이를 만나 실컷 이야기하면 좀 나아졌다. 그때, 재이가 해준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우리 중에 약국에서 일하다가 뒤돌아 눈물 안 흘려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이 말을 듣고, 그동안 사리씨는 나에게 힘든 일을 좀처럼 털어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슈퍼맨 같은 사리씨이지만, 그라고 힘든 일이 없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사리씨는 나보다 1년 앞서 같은 과정을 공부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과정을 공부한 학생들 중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령의 외국인일 것이다. 게다가 마땅히 교류하는 친구도 없었다. 내가 뉴질랜드로 오기 전, 혼자 지냈던 1년 동안은, 학교에 다니며 집 근처 식당에서 접시도 닦고, 주말이면 나이트 마켓에서 펄펄 끓는 기름에 팝콘을 튀겨 파는 일도 했다. 약국에서는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결국, 실습하던 약국에 부탁해 발런티어로 약국 경력을 쌓았다. 학교 졸업 전에 여러 약국에 이력서를 돌렸지만, 면접의 기회도 얻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어렵사리, 사리씨를 필요로 하는 약국을 만나 그 약국에서 풀 타이머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리씨가 약국에서 일한 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사장님이 흔쾌히, 사리씨의 시급*을 올려주셨다. 시급 이외에 영주권에 필요한 다른 조건은 이미 다 충족되어 있던 터라, 곧장 레지던트 비자(영주권)를 신청했다. 사리씨의 오른 시급이 적힌 새 고용 계약서를 받아 든 날은 레지던트 비자를 받던 날 만큼이나 기뻤던 날이다. 우리는 그날 레스토랑에서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그날, 그가 꼭꼭 숨겨두고 말하지 않았던 몇 가지 이야기들을 했다.
어느 날부터, 화장실 청소 용역을 부르는 대신, 그에게 화장실 청소를 맡겼던 일, 약사가 때마다 점심 심부름을 시켜서 그가 원하는 메뉴를 사다 주어야만 했던 일, 기껏 사다 주면 작은 트집을 잡아 교묘히 사리씨를 괴롭히던 일, 교통비나 출장비 없이 환자들에게 약 배달을 다녀야 했던 일까지. 사리씨는 별일 아닌 듯 그저 담담히 말했지만, 그간 속상했던 일들을 혼자 추스르며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구나 싶어, 듣고 있던 나는 짠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영주권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제출하고, 꼬박 8개월을 기다려 우리는 뉴질랜드 레지던트 비자를 받았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거주와 고용에 제한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인데, 날아갈 듯 가벼운 기분과는 별개로 당장 생활에서 느껴지는 변화는 없었다. 이래서 다들 영주권이 산소와 같은 것이라고 하나 보다. 사리씨와 나는 각자의 약국으로 어제도 오늘처럼, 다음 날도 어제처럼 출근했다. 나는 업무 환경이 더 나은 다른 약국으로 이직해야겠다는 꿈, 사리씨는 테크니션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꿈이 마음속에 꿈틀대는 것을 감춘 채 말이다.
*뉴질랜드는 기술 이민 영주권 신청에 있어 나이, 학력, 경력, 영어 등과 함께 시급과 관련한 규정이 있다. 이민성에서 정해놓은 기준 이상의 시급(연봉)이 되어야 영주권을 신청하는 자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