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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 살로메 May 26. 2024

에릭 로메르의 나라로 떠나다.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


1. 프랑스로 떠나기 전 ‘에릭 로메르’ 관련 책을 마저 다 읽었다. 이 책은 정말 번역이 엉망이어서 출판사에 전화해서 이야기했더니 그럴 리가 없다는 뉘앙스로 다시 한번 검토해 보겠다는 애매한 답변을 주었다. 사실 이 책의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었다. ‘프랑스’를 떠올리면 언제나 로메르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로메르가 얼마나 파리의 옛 건축물들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파리는 15년 만에 들르게 될 것 같은데 난 과거에 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에게 파리는 낭만의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저 지저분한 거리와 비위생적인 환경, 더러운 센강 등 조금 버거운 도시로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도 그 도시도 파리의 사람도 변했을 거란 조심스러운 예감이 든다.



2. 비행기 안에서 읽을 휴대하기 편한 책(세상의 모든 시간/ 토마스 기르스트)을 구입해 뒀는데 갑자기 에릭 로메르의 ‘희극과 격언1 각본집’을 챙겨가고 싶어졌다. 1) 비행사의 아내 2) 아름다운 결혼 3) 해변의 폴린 이 담겨있는.



3. 문득 프랑스 영화가 보고 싶었고 우연히 예전에 타이밍을 놓쳐 보지 못한 영화 ‘다가오는 것들 L’avenir‘을 보게 되었다. 영화가 몹시 좋았고 이 영화에 대한 황현산 교수님의 글 ‘미래의 기억’이 생각나서 새벽에 꺼내 읽었다. 그러다 문득 트위터로 한 번씩 이야기를 나누었던 교수님이 그리워졌고 글들을 읽으면서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존경할만한 지성인을 찾기 힘든 요즘이다.


4. ‘에릭 로메르’의 프랑스 건축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과 유현준 교수의 현대건축에 대한 대립되는 견해가 흥미로웠다. 유현준 교수가 그의 책에서 극찬하는 프랑스의 ‘퐁피두 센터,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르 코르뷔지에 건축물. 그리고 관점의 차이, 이 지점이 조금 흥미로워서 한번 더 꺼내본 책.



5. 로메르 감독 특별전 덕분에 그동안 미개봉 상영작을 마저 보고 떠나게 되었다.


로메르, 아..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더더더 좋고 사랑스럽구나! 그의 모든 영화들. 캐릭터 공간과 구도 그리고 색감과 이야기들. 내 생애 로메르보다 더 매력적인 감독을 찾을 수 있을까. 역시 좋다. 너무 좋다.


특히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 첫 번째 이야기 ‘블루아워’가 정말 좋았다. 한적한 프랑스 시골의 고요와 정적 그리고 자연의 소리. 블루아워가 찾아오는 그 기적 같은 순간의 벅참과 감격. 잠시 숨을 멈출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대비되는 파리의 소란스럽고 다소 지저분한 거리. 그 공간 속 두 소녀의 유쾌한 에피소드들.


내게 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봄 이야기’ '잔느'‘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에서의 ‘미라벨’처럼 다소 차갑고 도시적이며 시크한 느낌의 여성이지만. 순수하고 밝고 엉뚱한 시골 소녀 ‘레네트’ 또한 너무 너무 사랑스럽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배우가 지닌 매력을 발견하고 그 매력을 스크린으로 끌어내는 건 언제나 감독의 몫이다.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 늘 그런 생각이 든다.



p.258 우리가 첫머리에서 말했던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서도 파비앙과 그의 친구들이 모여 사는 산골의 농가가 그 작은 낙원에 해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 작은 낙원은 저 행복한 세계가 이 불행한 세계에 설치한 연락처이며, 이 결여된 세계에서 저 완전한 세계의 확실한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예행연습이다. 그것은 어떤 관념 속으로의 망명이 아니다.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꾸준한 실천은 없기 때문이다.


(중략)


루소의 쥘리가 말하는 것처럼, 희망하는 것을 상상하는 매력이 그 원인인 정염만큼 깊어지는 순간은, 만해에게서처럼, 희망이 곧 미래의 기억이 되는 순간이다. 제가 가졌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희망으로 미래의 기억을 만드는 시의 깊은 감각은 멀리서 오고 있는 아름다운 삶을 지금 인간의 육체 속에 구현한다. (2016.11)


-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 미래의 기억 -




p.694 로메르는 건설하고 파괴하는 건축에 대한 반감을 품고 보수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평생 유지한다. 예를 들어, 그의 구 파리 도심 조직에 통합된 대부분의 새로운 건물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몽파르나스 타워, 퐁피두 센터, 프랑스 국립 도서관 등이 그런 경우다. 시네아스트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오래된 건물에 오늘날 건축가의 기념비적 야망을 담음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런 류의 오만한 공존과 혼합이다.


”20세기 초반에 세상을 다시 만들고 싶은 과도한 자부심을 가진 건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건축이 인간의 삶을 바꿀 거라 믿었다. 그것은 전체주의적 몸짓이었다. 과거를 근절시키고 모두를 위해 어디에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신이 좋은 대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루브르를 구조하라! Au secours le Louvre!‘ 협회의 초기 회원이 됐다. 이 협회는 위대한 루브르 계획과 루브르 피라미드pyramide de Pei에 반대하고, 미셸 기Michel Guy와 브뤼노 푸카르Bruno Foucart가 함께 ’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을 변질시키는 쓸모없는 피라미드를 반대하고, 지하 공간의 문화잡화점을 반대하고, 불일치하고 비합리적인 야심 찬 계획에 반대해 항의한다.


- 에릭 로메르 은밀한 개인주의자 ㅣ앙투안 드 베크, 노엘 에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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