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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 살로메 Jan 13. 2022

불안의 서

숫자에 얽매이는 삶

너무나 솔직해서 슬픈 이야기들


어느덧 브런치에 글을 쓴 지 몇 달이 지났다. 내가 가장 쓰고 싶었던 매거진은 정작 인기가 없고 Daum에서는 나의 여행 글만 노출시켜주고 있다. 처음에는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꾸준히 글을 쓰자고 다짐했지만 나도 그저 평범한 사람일까? 자꾸 '숫자'에 눈길이 간다. 처음에는 구독자 수가 두 자리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고 겨우 겨우 12가 되었는데.. 하.. 예수님과 열두 제자처럼 그 숫자는 변하지 않았으며 하물며 한참 지난 후에는 1명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지금은 11명. 저 꼿꼿한 숫자를 보고 있자면 나의 구독자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11일 것만 같아서 몹시 슬프다.


그러다 이 밤중에 문득 '인기'는 무엇일까? 도대체 '인기'라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초등학생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난 누구나 한 번쯤 해본다는 반장, 부반장을 해본 적이 없다. 초등학생 때는 나름 차분하고 공부도 잘했지만 인기라는 건 정말 없었다. 언제나 반장, 부반장의 조용하고 착한 단짝 친구였달까.


사실 브런치 작가를 신청할 때도 대중적이지 못한 글을 쓰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한 단계 더 솔직히 말하자면 글에 이미지를 넣는 것도 싫었으며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문장만 나열하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 독자들은 난독증을 일으킬정도의 줄줄이 긴 문자의 나열을 좀처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감성적인 사진이라든지 그림이라든지 그들의 지루함을 상쇄시킬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정말 신기한 것은 내가 만족하는 글은 절대 브런치와 Daum에서 노출시켜주지 않는다는 거다. 나의 주목적이 아니었던 여행 글들만 어찌나 열심히 노출시켜주시는지.. (불만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나다운 글을 쓰고 싶을 뿐. 나는 노출이 잘 되는 글보다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은 것뿐인데.. 그러다가는 영원히 구독자 11에 머물러 있을까. 아니지. 점점 줄어서 0으로 수렴될지도 모르겠다.


침대에 누웠다가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새어 나와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 앞에 앉아서 타자를 두드린다. 그리고 '페소아'의 '불안의 서'라는 책을 떠올린다. '불안...' 어찌 보면 내 인생에 가장 핵심적인 단어가 아닐까 싶은 '불안'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찬찬히 바라보며 나의 글쓰기는 계속해서 이 불안을 적어 내려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렴풋이 구독자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알 것도 같지만 또 마냥 '인기'를 위해서 그런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작가가 된다는 건 정말 쓸쓸한 일이라는 걸 실감한다. 진실된 이야기를 하다가 영원히 고립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어떤 날은 꽤 두렵고 겁이 난다.


사랑받는다는 것.

그것이 꼭 진실은 아닐 수 있다.


인기 있다는 것.

그것이 꼭 기쁨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누구도 읽지 않는 이 글들이 작은 생명일 수도 있겠지.

나를 숨 쉬게 한다면 그것만으로 고마운 일일 테지.


브런치가 내게 숨구멍이 되어주길 바란다.

'인기'나 '숫자' '노출'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처음 시작의 그 다짐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안심시켜보는 1월의 몹시 추운 밤.


'불안'이 곁에 있어서 펜을 든다.


* 읽은 책 제목으로 글을 씁니다.



<넘기지 못한 페이지>



49


p.102 나는 고립이 그려놓은 자화상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내 사고는 즉시 느려진다. 평범한 사람은 타인과 대화를 나누면 감정을 표현하고 논리적 사고를 전개하는 데 자극이 되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대화가 일종의 반-자극 역할을 한다. 두 개의 어휘를 이렇게 붙여놓는 것이 어법에 맞는지는 모르겠다. 혼자 있으면 나는 수없이 많은 뛰어난 표현과 그 누구도 묻지 않을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 누구와도 나누지 않을 지적이면서도 재기 넘치는 풍요로운 영감의 대화가 전부 가능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누군가 육체를 가진 다른 사람이 앞에 마주 앉아 있으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다. 나를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극심한 피곤만을 느낀다. 그렇다. 타인과의 대화는 나를 졸리게 만든다. 오직 내 상상의 유령 친구들만이, 오직 꿈속에서 진행되는 대화만이 현실이고 진실이며, 고유한 개성을 갖는다. 그런 대화에서만이 정신은 거울 속에 비친 상처럼 현존한다.


게다가 타인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나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예를 들어 친구와의 간단한 저녁식사 약속조차 나를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신경과민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모든 종류의 모르는 사람이든 누군가를 역으로 마중 나가는 행위, 이런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그날 하루 종일,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전날 저녁부터, 나는 이미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만다. 걱정이 되어 잠도 잘 수 없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닥치면 대개 별문제 없이 원활하게 진행이 되고, 내가 미리 걱정하고 조바심칠 이유는 사실상 전혀 없었다고 판명이 난다. 그러나 매번 똑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이미 여러 번이나 그와 같은 일이 있었지만 그 경험으로부터 나는 결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내 습관은 사람이 아니라 고독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 말이 루소의 것인지 아니면 세낭쿠르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누구의 말이든 그 사상가는 나와 같은 영혼의 소유자까지는 아닐지라도, 같은 유형의 인간인 것만은 확실하다.


- 불안의 서 ㅣ 페르난두 페소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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