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친한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 나 마스크 사려고 하는데, 공구할래?]
[어. 할래. 할래.]
[와, 이러다 나중에 공기를 사겠다. 사겠어.]
그녀의 진담이 섞인 농담은 며칠이 지나도록 나의 ‘양치타임’(이라 쓰고 이솔의 최대 영감(靈感)타임이라 말한다.)에 빠지지 않고 떠오르는 주제였다. 언제부터 우리는 외출 전, 공기 상태를 체크하고, 마스크를 챙기는게 일상이 되어버린 걸까. 심지어 하루는, 먼지가 자욱한 밖으로 생각없이 나왔다가, 마스크를 챙기지 않은 게 생각이 나서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인간에게 최대 축복이라고 하는 ‘비염 없는 체질’을 타고난 내가, 황사에 괴로워하던 친구들을 비웃던 내가, 요즘은 코를 훌쩍이며 재채기를 한다. 그런 생각이 드니 무서웠다. 타고난 체질의 힘과 귀차니즘을 뚫어버린 미세먼지의 존재가. 더불어 마스크를 챙기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내 행동이. 순간 깨달았다. 왜, 미세먼지가 내 양치타임을 지배했는지.
나에겐 미세먼지 같은 존재들이 몇 있었다. 집착이 너무 심해서 헤어지자고 말했는데도 계속해서 우리 집 앞에 찾아오고,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끈질기게 전화를 하던 놈. 기념일날 추리닝을 입고 늦게 등장하셔서 대판 싸워놓고, 나에게는 “ 왜 요즘 원피스 안 입어?”라고 말해서 또 싸웠던 놈. 같이 탄 버스에서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서 인사했더니, 이성 친구에게 왜 그렇게 반갑게 인사를 하냐며 화를 내던 놈. 이렇게 적고 보니, 친구들이 진지하게 붙여준 별명이 생각난다. 일명 ‘돌아이들의 아이돌.’
그들의 아이돌 현역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 그때 왜 안 헤어졌어?” 였다. 하지만 미세먼지 같은 연애는, 처음부터 ‘매우 나쁨’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매우 좋음’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매우 나쁨’ 단계까지 가다가 이후에는 ‘매우 나쁨’단계의 빈도가 상당해진다. 그럼 나는 자욱한 미세먼지 속에서 마스크를 챙기듯, 당연하게 마음 속에 미세먼지 마스크를 씌운다. 비정상적인 것을 합리화하거나, 혹은 단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가스라이팅’이라고 말한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 : 가까운 관계를 이용하여 상대의 현실감과 판단력이 흐려지도록 세뇌하는 것.
최근 ‘데이트 폭력’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자주 등장하는 이 말은, 영화 가스등(Gas Light)에서 비롯되었다. 이 영화는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것으로, 여주인공 폴라의 남편 그레고리가 그녀가 상속받은 유산을 빼앗기 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한다는 내용이다. 그레고리의 계획은 단순했다. “폴라가 자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 최종적으로 그녀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레고리가 주변인들과 폴라 자신이 그녀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라 믿게끔 속이기 시작할 때, 폴라가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의심하고, 부정했으며, 나는 미친 것이 아니라고 소리친다. 당시 나도 그들과 하는 연애가 일반적인 연애는 아닌 것 같다는 낌새는 눈치챘고, 부정했으며 그들에게 ‘이건 정상적인 연애는 아니야!’ 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폴라와 예전의 내가 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그와 헤어지는 것. 사랑인 것같은 세뇌에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돌아이들의 아이돌’이라고 불릴만큼 내게 가스라이팅이 자주 일어난 이유를 알고 있다. 바로, 자존감이 낮고 자기 주관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한다며 접근하는 그들에게 쉽게, 그리고 무분별하게 의지했기 때문이다. 보통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들은(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가스라이팅’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연인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때문에 그들은 연애 초반 아주 달콤한 모양새로 접근하는데,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기 시작하면, 서서히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끊임없이 상대에게 주입한다. 나의 옷차림 부터 시작해서 내가 꿈꾸는 미래까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상대에게 “날 사랑해줄 사람은 너뿐이야.”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이 ‘자기 주관과 자존감’인데 나는 그게 없었기에 그것마저 나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 자신을 믿지 못하고 그를 믿기로 한 것이다.
그런 연애의 끝은 항상 나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아프게했고, 그 결과, 나는 이제 “나에겐 너뿐이야, 그리고 너에겐 나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과 만나지 않는다. 그건 정말 위험하다. 그 사람을 만나는 나에겐 소중한 사람들이 있고 너무나도 소중한,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내가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한 상대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란 나의 ‘연애 주관’이 생겼다.
그렇게 주관이 생기고 난 뒤 어떻게 되었을까? 이솔의 연애 횟수는 급격하게 줄었고 ‘솔로 기간’이 늘었다. 무분별한 연애가 줄어든 대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사실 나같이 의존적인 연애를 반복하면, 혼자가 된 순간 드럽게 외롭고 심심하다. 다행히, 나에겐 유일하게 좋은 습관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고민이 생기면 그 고민과 관련된 책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고민이었으므로 외로움과 관련된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고, 내가 읽은 책들은 나의 종아리를 때리며 이렇게 이야기했기에. 나는 그렇게 살기로 했다.
일단, 네가 믿을 수 있는 너를 만들어. 그 다음에 그런 너를 믿어주는 사람을 사랑하도록.
*이 글은 코로나19 발생 전 쓰여진 원고로, 아마 코로나19 발생 이후 썼다면, 제 마스크의 주제는 미세먼지가 아니라 코로나 19였을 것 같습니다. 다들 이 시국에 무사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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