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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심 Sep 24. 2024

어쩌다 어글리코리안

춘천의 닭갈비만큼이나 뉴욕의 스테이크는 뻔한 음식이다. 뻔하다고 포기하기에는 대체할 만한 기가 막힌 음식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스테이크는 가격대가 높은 메뉴군으로 ‘특별한 날에만 먹는 고급음식’을 의미한다. 어릴 적에 기적적으로 받아쓰기를 80점 받아온 날에는 아빠는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기분이다. 오늘 스테이크 썰러 가자.”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지금보다 특별한 날이 또 있을까. 대신, 비교적 저렴한 레스토랑을 찾자. 뉴욕에서 제일 유명한 피터 루거(peter luger)는 1887년부터 시작해서 130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불판 위에 티본스테이크가 지글지글 소리와 함께 등장하면, 웨이터들이 숟가락을 들고 온다. 스테이크가 얼마나 부드러운지를 보여주기 위해 칼이 아닌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자른다. 스테이크를 클래식하게 먹을 수 있어, 뉴요커와 여행자 모두 찾는 레스토랑이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피터 루거’로 정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 아쉽게도, 메뉴 하나에 10만 원이 넘는 가격을 혼자 내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동행을 포기한 대가로 스테이크의 클래식을 리스트에서 지워야 했다.      


내가 정한 곳은 ‘가성비 스테이크’로 유명한 갤러거 스테이크 하우스(Gallagher Steakhouse)다. 금액에 연연하지 않는 여행을 위해 뉴욕으로 온 게 아니냐며 따져 물을 수 있다. 가성비 스테이크라고 해서 금액대가 파격적으로 낮은 건 아니다, 다른 식당보다 금액대는 10달러 정도 저렴하다. 하지만, 1인 코스 메뉴가 있어서 맛볼 수 있는 요리수가 많다는 점이 차별적이다. 


예약한 시간에 맞춰 식당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른쪽 유리벽 안에 있는 숙성실이 보였다. 겹겹이 쌓여있는 소고기들이 간판을 대신해서 스테이크를 열심히 홍보 중이었다. 자리 안내를 담당하는 앨리가 나를 반겼다. 미국은 직원이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는 문화가 있다. 어느 식당이든 직원이 안내해 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앨리를 따라 들어간 홀은 미국의 70년대 빈티지 감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어두침침하지만 아늑한 밝기와 빨간 벽지, 벽에 빼곡히 걸려있는 흑백 사진액자, 둥근 테이블이 인상적이었다. 비즈니스 뉴요커들이 앉은 테이블 사이로 검은 앞치마를 맨 웨이터들이 분주히 걸어 다녔다. 연령대가 무색하게 다들 체계적이면서 빠릿빠릿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런치타임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코스요리는 애피타이저 수프, 스테이크, 치즈케이크 이렇게 3가지 구성이었다. 수프는 그릇 밑에서 누가 자꾸 수프를 퍼다 주듯이 양이 도무지 줄지 않았다. 절반 정도 남기자 메인 요리인 ‘필레 미뇽’ 스테이크가 나왔다. 안심과 등신 부위인 필레미농은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를 우습게 하는 맛이었다. 부드럽고 육즙이 입안에서 씹는 족족 팡팡 터졌다. 무엇보다 사이드로 나온 구운 감자를 떠올리면 아직도 입맛을 다신다. 망고 모양의 감자는 버터와 설탕에 절인 듯이 풍미가 가득했다. 웨이터들은 동행이 없어서 호들갑 떨지 못하는 나를 알아챘는지 지나가며 음식 맛이 어떤지 물어봤다.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엄지 척을 보였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 이 순간을 고정시키고 싶었다. 

식사하면서 눈인사를 가장 많이 한 웨이터분에게 사진 찍어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정리하던 테이블을 냅다 뒤로하며 내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화면 속 나를 쳐다보며 그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일하는 식당에서 사진을 찍을 정도로 맛있게 먹은 손님이 있다는 게 뿌듯하다는 표정이었다. 웨이터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식당에서 손님의 만족이 요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분위기와 서비스도 만족도에 포함되는 요소다. 웨이터는 서비스에 최선을 다했고, 나의 만족에 자신의 영향도 있다는 걸 아는 듯했다. 


계산할 차례가 되었다. 이번 식사는 팁을 평소보다 많이 지불해도 아깝지 않았다. 다른 식당은 5달러였다면 이번에 10달러 내야지. 웨이터가 다가와서 물었다.      


“cash or card?”

“card, please”     


웨이터는 별다른 영수증 없이 내 카드를 건네받곤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팁을 낼 시간도 없이 계산이 끝났다. 계산이 끝난 다음에야 영수증과 함께 볼펜을 건네받았다. 영수증에 사인하고 팁을 적는 칸이 있었다. 어떻게 팁을 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10달러를 쓰고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출구에 있는 카운터에 팁을 내는 공간이 따로 있는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얼떨결에 팁을 내지 않고 식당을 나와버렸다. 한국에 도착해서, 뉴욕여행을 지인에게 물었다.      


“뉴욕에서 엄청난 민폐를 저지르고 왔네. 팁을 적은 만큼 영수증에 지폐 10달러 끼워두고 왔어야지.”     


뉴욕에서는 팁이 종업원의 생계비용이 된다. 높은 임대료를 대신해서 팁으로 그들의 월급을 충당해야 한다. 나는 웨이터의 생계비용을 줬다 뺏은 셈이다. 아직도 텅 빈 빌지 패드를 들추다 망연자실했을 웨이터를 생각하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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