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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심 Oct 06. 2024

뉴요커가 여행자와 공존하는 법

뉴욕은 일주일 내내 주말이었다. 

여행 3일 차의 아침, 눈이 아침 일찍 떠졌다. 시간을 보니, 새벽 6시였다. 일정은 9시부터 시작이니 3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평소처럼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숏폼으로 시간을 죽이다가 이런 생각이 번쩍 들었다.      


‘여행까지 와서, 핸드폰을 보다니 말도 안 돼’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든 가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후, 거리에 나섰다. 아침 7시의 맨해튼은 오후처럼 분주했다. 시끌시끌한 도로 소음 사이로 안전모를 쓰고 형광 조끼를 입은 인부들과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염없이 걸으며 바쁜 뉴요커를 구경하다가 한 카페에 발길을 멈췄다. 야외 테이블에는 커피와 함께 신문을 읽는 남자가 있었다. 내 방 벽에 붙어있는 엽서 속 한 장면 같았다. 그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여행자가 아닌 뉴요커의 기분을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페에 들어섰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 회사 지각을 겨우 면할 정도까지 잠을 자는 나로서는 이른 아침에 카페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출근 전까지 최선을 다해 누워있는 게 나의 생존방식이었다. 여행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경험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카페에 들어서자, 직원인 안나가 인사했다. 안나는 영화 <타이타닉>에 나오는 케이트 윈슬렛을 닮았다. 래미네이트를 했는지 가지런한 치아가 미소 사이로 돋보였다. 시원한 차이라테와 토스트 하나를 주문했다. 카페에서 아침 식사로 4만 원이나 결제했다. 한국이었다면 어림도 없을 메뉴라고 생각하며 안 나가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았다. 


카페는 이른 아침에도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반려견을 동반한 손님도 거리낌 없이 들어오고, 에스프레소 한잔과 함께 패션 잡지를 읽는 사람도 내 옆 테이블에 앉았다. 나도 자리에 앉아 책 한 권을 꺼냈다. 물론 집중되지 않았다. 책 보다 사람 구경이 더 재밌기 때문이다. 내가 신기하게 바라봤던 건, 조찬모임이었다. 출근하기도 벅찬 아침에 약속을 잡다니…. 조찬모임이 세 테이블이나 되었다. 그들의 활발한 대화 때문인지 카페가 바깥보다 쨍한 분위기였다. 오늘이 주말인가 싶어서 날짜를 확인했지만, 목요일이었다. 정말이지 일상에 경계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구나. 

      

내가 주문한 차이라테와 토스트가 나왔다. 혹시 4만 원짜리 이삭 토스트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다. 내가 아는 토스트의 최대치는 이삭 토스트였다. 막상 나온 토스트는 파인 다이닝에 나올 법한 비주얼이었다. 바게트의 한 면을 버터에 구운 다음, 매시 포테이토와 부라타 치즈가 듬뿍 올려져 있었다. 슴슴한 차이라테를 마시고 토스트를 한입 먹자, 기분이 맛있었다. 여행하다가 벅차서 울컥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어이없는 곳에서 터지곤 한다. 카페에서 토스트를 먹었을 때가 그랬다. 내가 지구 반대편에서 뉴요커들과 함께 섞여 아침을 보내고 있다니, 출세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몽글했다. 내 눈가가 촉촉해진 걸 눈치챘는지, 안나가 다가와 음식 맛이 괜찮은지 물었다.      


“Perfect.”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대답이었다. 그러고 보면, 뉴욕은 평일과 주말 간의 분위기 격차가 좁은 도시다. 평일에는 일, 주말은 휴식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나는 여행 내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가늠조차도 어려웠다. 뉴욕만 일주일 내내 주말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센트럴파크를 갔다가, 예약한 재즈 공연을 볼 수 있는 라이브바 dizzy club으로 향했다. 테이블 예약은 따로 하지 않았다. 평일은 사람이 적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반대로 무대와 가까운 테이블은 자리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내가 배정받은 자리는 척추가 휘어지도록 꺾어야만 무대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내 뒤로도 손님들이 줄기차게 들어왔다. 재즈 공연은 처음이었다. 보컬이 아닌 각각의 악기가 돌아가며 메인을 맡아 연주를 리드했다. 그중에서 백발 연주자의 색소폰이 기가 막혔다. 평소 색소폰 하면 아저씨들의 끈적한 연주가 떠올랐지만, 이번 연주는 역동적이면서 악기들의 화음 위로 색소폰 소리가 춤을 췄다. 저녁 7시부터 시작한 공연은 1시간 정도 이어졌다. 애석하게도 시차 적응이 덜 된 나는 연주가 절반 정도 지나자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꼬집어도 삐져나오는 하품을 막을 수가 없었다. 꾸벅 졸다가 옆자리에 앉은 백발 할머니인 마사의 어깨에 고개를 살짝 박았다. 죄송하다고 하자, 마사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사는 1시간 공연 내내 눈을 감고 고개를 까딱이며 연주를 음미하고,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치며 박자를 타기도 했다. 연주가 끝날 때마다, 마사는 머리 높이 손뼉 치며 외쳤다.      


“Bravo!!!!!”     


마사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자리에 홀로 앉아 여운을 만끽했다. 많은 사람이 재즈 공연을 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관객석을 풍성하게 채웠다. 평일에도 다들 음악적인 낭만을 알뜰히 챙겼다.      


뉴욕은 365일 내내 여행객들이 찾는 명소다. 여행객과 현지인이 공존하다 보니,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지워진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뉴요커도 여행자의 마음으로 일상을 여행처럼 살고, 여행자도 뉴요커의 기분을 내기 위해 아침에 커피를 마시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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