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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심 Oct 12. 2024

스몰토크 하이에나

스몰토크는 영어보다 마음이 먼저

AI와 영어 스피킹을 할 수 있는 ‘스픽’을 깔았다. 첫 달은 무료라 출국 전까지 아주 유용하게 썼다. 명태가 말하길, 뉴욕은 스몰토크의 강국이라 나 홀로 여행도 외롭지 않다고 했다. 외국인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전에 한 시간 동안 스픽의 AI와 영어로 대화했다. 하지만 대화는 매끄럽지 않았다. 스몰토크를 주제로 선택했지만, AI는 우리말로도 대답하기 어려운 심오한 질문을 던졌다.      


“한국의 빠른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야?”     


질문의 절반도 대답하지 못한 채, 핸드폰을 덮어야 했던 밤이 많았다. 그래도 여행에서 필수라는 문장 하나는 악착같이 외웠다. “Can I get a….” 식당에서 주문할 때, 어떤 메뉴를 넣어도 괜찮은 문장이었다. 뉴욕에서 가장 처음 방문한 가게는 ‘스타벅스’였다. 공항 셔틀에서 내려 화려한 맨해튼을 처음 걸었던 날이었다. 우연히 스타벅스를 발견하자 낯선 곳에서 만난 친구처럼 반가워서 와락 안기고 싶었다. 계산대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내 차례가 다가오자 침을 꼴깍 삼켰다. 한국에서 수천 번도 더하는 주문이지만, 어릴 적에 생애 첫 심부름 미션을 받은 것처럼 긴장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미소 발사. 스픽으로 외어놓은 문장을 말하려는데, 직원이 당황스러운 질문을 했다.      


“What’s your name?(이름을 말해주세요.)”


미국의 스타벅스는 음료가 준비되면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 그게 스타벅스가 성공한 요인 중에 하나다. 스피킹만 연습했지만 영어 이름을 따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한국 이름을 말하기에는 스펠링이 너무 길었다. 이미 내 뒤에는 긴 대기 줄이 있었다. 말이 없자, 직원이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급한 대로 이름 중에 마지막 한 글자를 말했다.      


“EUN.”     


무사히 주문을 마쳤다. 뉴욕 스타벅스는 놀랍게도 테이블이 없었다. 창틀에 구겨 앉아 한숨을 돌렸다. 문득 영어로 주문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집에서 연습할 때는 지나치게 굴린 발음이 듣기 싫었다. 그래서 동그랗게 말할 수 있는 발음을 일부러 네모나게 발음하곤 했다. 하지만, 여기는 영어권인 뉴욕. 혀 굴림에 박차를 가해도 되겠다. 영어 주문을 더 하고 싶어서 다른 가게를 연이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직원이 호출하는 이름 중 유독 한 이름이 귀에 튀어 올랐다. 참 희한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EU. Here's your drink. (이유~ 음료 나왔습니다.)”     


내 이름이었다. 어쩌다 내 이름이 외국인들이 더러운 물건을 만질 때나 나오는 탄식으로 바뀌었다. 두리번거리는 손님들 사이를 비집고 음료를 잽싸게 받아 가게를 나왔다. 음료를 마시며 일주일 동안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영어 이름을 고민했다.


 그 후로, 스타벅스 외에는 영어 이름을 소개할 기회는 없었다. 명태의 말과는 다르게, 아무도 나에게 말 걸지 않았다. 스몰토크 강국이라더니, 뉴욕도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심지어 수천 명이 지나가는 타임스퀘어 한복판의 야외테이블에서 밥을 먹어도 아무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입이 심심했다. 여행 내내, 식당 영어만 실컷 하고 가겠구나 싶을 때,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스몰토크의 장이 열렸다.


마지막 날에는 뉴욕의 하늘이 얼룩덜룩했다. 어떤 하늘은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어떤 하늘은 또 맑았다. 우산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2km가 넘는 브루클린 브릿지를 걸었다. 브루클린 브릿지 바로 옆에는 맨해튼 브릿지가 있어, 두 개의 입구가 헷갈릴 수 있다. 나도 길을 잘못 들어서 몇 번이나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입구를 겨우 찾아 브루클린 브릿지를 걷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체이스는 바람막이가 펄럭일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스치며 물었다.     


“Is this the right way to Brooklyn Bridge?(여기가 브루클린 브릿지로 가는 길이 맞나요?)”

“Yes!”     


누가 봐도 여행객인 나에게 누가 봐도 현지인인 체이스가 길을 물었다. 간단한 나의 답에 체이스는 엄지 척을 날려주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브루클린에서 맨해튼으로 가는 웅장한 도시 풍경을 구경하는데, 어느새 브릿지의 중간까지 와있었다. 유리 외벽의 건물들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빙하 같기도 했다. 난간에 기대어 쉬는데 체이스와 또 마주쳤다. 여전히 바람막이를 펄럭이며 다가와 뭐라 말을 걸었다. 애석하게도 체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염소웃음으로 대답을 대체했다. 체이스는 모호한 나의 반응이 머쓱했는지 빠르게 지나쳤다. 역시 언어는 단기간에 늘기가 불가능하다. 체이스의 말은 이랬다. 

   


“We made it!”     


직역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건데 뭘 만든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체이스의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 말을 곱씹었다. 갑자기 그 말의 의미가 번뜩 떠올랐다. 우리가 해냈다는 의미였구나. 뉴욕의 버킷리스트였던 스몰토크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체이스에게 달려가 바로 앞에 해주지 못한 대답을 해주었다.      


“You're right. We did it.”

 

체이스는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엄청난 영어를 쏟아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해도 알아들은 척했다. 맨해튼에 가까워질수록 끝내주는 도시 전경이 펼쳐졌다. 영어로 감탄사를 해보고 싶어 용기 있게 체이스에게 말했다. 


“What a cool view!”

“yes. fucking cool!!!”


체이스의 fucking이 더 감탄스러웠다. 우리는 서로 사진도 찍어줬다. 체이스는 <무한도전>의 노홍철이 생각나는 손을 활짝 벌리며 발랄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다. 덕분에 나도 과감하고 상큼한 포즈를 편하게 취할 수 있었다. 맨해튼에 닿을 때까지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서툰 영어 실력이 들통났는지 체이스는 질문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알아들은 몇 단어를 조합해 보자면 LA에서 일하다가 휴가 차원으로 뉴욕 여행 중이라고 했다. 브릿지를 다 걸을 때쯤, 나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체이스가 같이 저녁 먹자고 하면 어쩌나. 미국의 식사와 더치페이 문화를 모르는데 어쩌나. 걱정이 무색하게 체이스는 맨해튼에 발을 닿자마자 가볍게 인사하곤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아쉬운 건, 나였다.     


한국에 돌아와, 명태에게 따졌다. 스몰토크 강국이라더니, 아무도 말 안 걸어줘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고 한탄했다.      


“네가 먼저 인사했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눈 마주치려고 했어? 눈도 안 마주치는데 나 같아도 말 안 걸겠다. 먼저 의사 표현을 해야 스몰토크가 성사되지.”      


스몰토크는 먼저 다가갈 줄 아는 열린 마음이 우선이었다. 눈도 맞추지 않는데 다가와주길 바라는 건, 스몰토크 강국에서도 욕심이다. 영어회화 전에 마음이 먼저여야 했다. 여행 내내, 길 찾느라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경계 선 긴장이 얼굴에 역력했다. 돌이켜보니, 누군가 다가오기 편안한 얼굴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면서도, 하염없이 내 할 일만 한다. 여행에서도 일상에서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새로운 영감은 어쩌면 뉴욕에만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바쁜 일상이라는 구름이 지나가면 새로운 사람과 영감이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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