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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심 Nov 23. 2024

집 나간 애국심을 찾습니다.

애국심은 어디서 오는가?

랜드마크 투어 페리의 야외 갑판에 자리 잡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가 비어있었기에 가방을 살포시 올려두었다. 잠시 후, 한국인 가족들이 다가와 자리를 보더니 내게 의자 위 가방을 치워줄 수 있는지 영어로 물었다. 나도 한국인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우리말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럼요. 여기 앉으세요.”

“어머, 한국인이었구나.”     


일행 중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능숙한 내 한국어 실력에 흠칫 놀랬다.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내 모습을 비춰봤다. 아무래도 중국인으로 오해한 듯했다. 복 많은 졸부 중국인 느낌이 물씬했다. 내 얼굴을 굳이 동양권에서 나눠보자면, 한국은 아니다. 어릴 적에는 베트남에서 왔냐는 말을 종종 들었고, 어른이 된 지금은 여행하며 중국어로 인사를 많이 받는다. 코 때문이다. 눈이 크고 초롱초롱하지만, 코가 눈을 초월할 정도로 눈에 띄게 크다. 큰 코가 복 많은 졸부 중국인 여사님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주요 범인이다. 항문을 조이는 케겔 운동처럼 코 근육을 조이는 운동을 30년 가까이했지만, 소용없다. 엄마는 다 예쁜데 코만 어떻게 안 되겠냐며 내 코를 쭈물거리지만, 당사자만큼이나 야속하겠냐는 심정이다. 코 수술할 용기도 없는 지금은, 어른들 말처럼 ‘복코’로 인정하며 조화롭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중국인으로 오해받으면 단호하게 한국인이라 말한다. 내가 아는 중국인은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 전부였다. 나는 그렇게 시끄럽지 않을 거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외국인이 중국만큼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걸 넘어서, 동경하는 눈빛을 보내는 게 신기했다. 하루는 지나가는 여자에게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대만에서 온 그녀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깜짝 놀라며, 서툰 한국어로 인사했다.      

“저 한국 드라마 좋아해서, 한국어도 배웠어요.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나라 위상을 높이는 데에 보탠 게 없음에도 어깨가 하늘에 걸렸다. 사진을 찍고 핸드폰을 건네받으며, 아주 감사하다고 평소보다 2배로 더 친절히 인사했다. 한국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녀들과 헤어질 때도 어리바리하게 걸었던 몇 분 전과는 달리, 아주 당당히 걸었다. 그녀들이 한국에 대한 로망을 아주 길게 가져주길 바랐다.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친구와 담배 피우며 ‘헬조선’이라고 탄식하기 바쁘다. 월급에서 세금을 왜 이렇게 많이 뺏어가느냐는 둥, 내 집 마련은 그림의 떡이라는 둥, 결혼하려면 장기를 팔아야 한다는 둥, 저출산이 당연하다는 둥. 빡빡한 회사생활로 얻은 건, 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뿐이다. 이 비관이라는 때를 한꺼번에 밀어버릴 수 있는 게, 여행이다. 일상에서 잠시 거리를 뒀을 뿐인데, 잃어버린 애국심을 찾게 된다. 


첼시마켓을 갔던 때였다. 마켓은 한국으로 치면, 시장과도 같은 개념인데, 첼시마켓은 특별한 점이 한 가지 있다. 야외에 지붕만 가리고 한 길로 쭉 뻗어있는 한국 시장과는 달리, 뉴욕의 첼시마켓은 벽돌 건물 내부에 여러 상점이 들어서 있다. 1890년대에 지어진 오레오 공장 내부를 리모델링해서 시장을 만든 것이 바로 ‘첼시마켓’이다. 내부 곳곳에 파이프라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벽에는 당시의 흑백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두 발로 서 있는 곳이 사진 속 장소와 같다고 생각하면 아득한 시간이 체감된다.    

 

   

시장은 나에게 푸근한 동네 어른과도 같은 인상을 가졌기 때문에, 어딜 여행하든 꼭 시장을 들른다. 첼시마켓을 본격적으로 구경하기에 앞서, 화를 내는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그날은 일정이 빠듯해서 오후 3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친구 명태가 꼭 가보라고 추천한 첼시 마켓 맛집인 ‘Los Tacos no. 01’로 향했다. 마켓 안에는 푸드 코트처럼 한 곳에 다양한 가게들이 모여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중, 줄이 가장 긴 곳이 내가 가려던 타코 집이었다. 한눈에 봐도 30분 이상은 족히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폭발이었다. 나의 배는 참을성이 한계치를 달했기 때문에 다른 맛집을 찾아봤다. 두 바퀴를 돌아본 결과, 딱 한 곳을 빼고는 대기 줄이 꽤 길었다. 다들 3시가 되도록 밥 안 먹고 뭐 했는지 궁금했다. 더 마음이 아팠던 건, 줄이 텅텅 비어있던 곳이 바로 한식당이었다. 심지어 바로 앞이 인기폭발 타코 집이어서, 한식당이 더 남루해 보였다.   

  

‘제육이 얼마나 맛있는데! 순두부찌개가 얼마나 맛있는데!’    

 

유명세보다 의리를 선택한 나는 씩씩하게 한식당으로 들어섰다. 아주 맛있게 먹어서, 이 한식당의 살아있는 간판이 되어주리라. 계산대에서 메뉴판을 뚫어지라 봤다. 사장님이 주방에서 쉬다가 부리나케 나왔다. 나를 맞이한 사장님은 다름 아닌, 파란 눈동자의 백인 아저씨였다. 흠칫 놀란 나는 자연스럽게 나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자세로 가게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나의 의리는 ‘한식’이 아닌, 해외에서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에 향해 있었다. 그래서 백인 사장님이 나를 맞이했을 때는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가끔 애국심이 비관을 뚫고 고개를 내밀 때는 언제나 ‘얼굴’이 떠올랐다. 월드컵 시즌에는 태극무늬를 붙이고 경기장을 뛰는 선수의 얼굴을, K-POP에는 한국 노래로 무대를 장악하는 아이돌의 얼굴이, 여행 중에는 현지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한국이라는 소속감이 체감된다. 무엇이든 구체적일수록 마음에 더 와닿는 법이다.      

한식당을 탈출해서, 갈 곳을 잃은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 타코 집에 줄 섰다. 가게 이름에 ‘No. 01(넘버원)’을 넣은 자신감만큼이나 타코 맛은 끝내줬다. 순식간에 타코를 먹어치우고, 푸드존을 벗어나며 한식당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여전히 한산했다. 언젠가 한국인의 의리를 보여줄 기회가 또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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