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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심 Nov 23. 2024

여행에 나이가 있나요?

젊다고 여행을 독점하려고 하지마

남자친구를 따라 배구 동호회를 간 적이 있었다. 배구에 죽고 배구에 사는 남자친구가 동호회에 가입했다고 했을 때, 불안했다. 배구를 향한 그의 진정성은 알겠으나, 동호회라는 곳이 순진한 그가 생각하는대로 배구만 하는 곳일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나에게 동호회는 중년 어른들의 ‘헌팅포차’였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산악회’다. 산 근처에 있는 숙박업소 입구에는 나뭇잎이 모아져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불륜 커플이 숙박업소에 들어가며, 신발에 나뭇잎을 묻히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니깐, 산을 장악하는 대신에 이성을 장악하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소문이지만, 나는 믿는 쪽에 더 기울었다. 산악회의 불륜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네 이장님은 아빠와 친구 사이였다. 이장님이 주민센터에서 마을 방송하는 걸, 동경의 눈빛으로 지켜봤던 기억도 생생하다. 부지런한 이장님은 학교 가는 길이나 친구들과 놀러 가는 길에도 자주 마주쳤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인사해주던 이장님이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늘 시끌하던 이장님네 집도 초상난 집처럼 고요했다. 하루아침에 이장님의 흔적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운 것 같았다. 이장님의 부재를 인지했던 날, 아빠에게 근황을 물었다.      


“이장놈의 새끼. 산악회에서 눈 맞아서 여자랑 도망갔잖아.”     


충격이었다. 산악회의 설화가 실제로 있는 일이라니. 그날부터 나에게 동호회는 ‘불륜의 집결지’가 되었다. 남자친구가 동호회에서 ‘누나’라는 아줌마들이 그에게 추태를 부리진 않을지, ‘형’이라는 아저씨들이 그에게 때를 묻히진 않을지 걱정이었다. 남자친구는 내가 얼마나 편협한 시선을 가졌는지 보여주기 위해 나를 배구장으로 데려갔다. 그의 작전은 통했다. 한번에 2가지의 편견을 벗겨냈으니, 성공이다. 우선, 한눈에 봐도 회원들은 배구에만 진심이었다. 네트 설치나 세팅할 때는 다들 모른 척하더니, 경기만 시작하면 다들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중년 어른들이 운동에 적극적인 모습은 생경했다. 무릎을 바닥에 찍고, 점프하고, 뛰고, 포효했다. 어른의 나이테는 앓는 소리로 나타난다고 여겼다. 근데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몸을 풀고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서른되더니, 계단 오르는 것도 쉽지 않다는 입버릇이 쏙 들어갔던 순간이었다.      


내가 통과해보지 못한 나이를 과소평가한 건, 동호회 뿐만이 아니었다.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환갑을 맞이해서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어떤 나라를 가고 싶냐는 말에 엄마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호주.”     


엄마가 호주를 가고 싶어하는 이유를 말하기도 전부터 잔소리 폭격기를 쏟아부었다.   

   

“비행 시간이 얼만지 알고 하는 소리야? 엄마 나이대 어른들은 관광보다는 휴양 쪽으로 가야 한다고. 호주가면 다리 아프도록 걸어다녀야 해. 그냥 휴양지나 찾아볼게.”     


엄마의 주눅 든 어깨를 외면하고, 괌으로 여행지를 정했다. 괌에서 엄마가 휴양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역시 괌으로 오길 잘했다고 자만했다. 관광 여행은 젊은 사람만 독점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뉴욕에서 내 자만이 산산조각났다. 우선 뉴욕행 비행기에서부터 아주머니들과 동행했으며, 틈틈이 가족 단위의 한국 여행객들과 많이 마주쳤다. 엄마뻘 어른들은  최소한의 피로함만 얼굴에 있을 뿐, 자식들만큼 뉴욕을 즐기기 바빴다.      

사실, 랜드마크 투어 페리에서 한국 가족이 나에게 가방 좀 치워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가족들이 생각나서 콧잔등이 시큰했다. 한국에서는 한달이 넘도록 연락이 뜸해도 보고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여행오니 엄마와 아빠가 애틋해졌다. ‘내가 이렇게 좋은 걸 보고 먹고 즐기는 동안, 아빠는 돌소파 위에서, 엄마는 부엌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구나’ 엄마와 아빠 또래의 어른들이 선그라스를 끼고 뉴욕을 멋지게 여행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내가 엄마의 환갑을 망쳐버린 게 아닐지 의심도 들었다. 뉴욕행 비행기에서 아주머니들이 자랑하듯 보여준 일정표에는 시간이 촘촘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하루에 가야만 하는 코스가 6개 이상은 되어보였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는 나의 말에 아주머니들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아줌마들이 젊은 애들보다 더 부지런하고 건강해. 저녁에 운동장 가봐. 죄다 아줌마야.”     


여행하다가, 어디선가 꺄르르 소리가 나면, 주변을 꼭 살폈다. 비행기 아주머니들이 뉴욕을 부지런히 장악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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