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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심 Nov 27. 2024

삐딱한 독서 로망

미션. 뉴욕공립도서관에 침투하라.

외출할 때, 핸드폰만큼이나 잘 챙겼는지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책이다. 그다음이 지갑일 정도로, 책은 일상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기다리는 데에는 책만큼이나 유용한 건 없다. 버스를 기다리거나, 친구를 기다리거나,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에 핸드폰만 보기에는 아까워 책을 읽는다. 나에게 독서는 지적 허영심이라고 할 수 있고, 안락의자에 푹 기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안전지대라고도 할 수 있다. 낯선 나라를 모험하는 여행에서는 특히나 안전지대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가방이 터질 듯이 무거워도 책은 꼭 챙겼다.    

  

뉴욕 로망 중에 센트럴파크와 뉴욕 공립 도서관에서의 독서가 있었다. 센트럴 파크의 드넓은 잔디에서 돗자리를 깔고 책 읽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캬아’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센트럴 파크 독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책은 조용히 집중했을 때, 읽는 걸 넘어서 와닿게 된다. 센트럴 파크는 풍경을 뒤로하고, 어딘가에 집중하기가 불가능했다. 광활한 잔디밭에 이국적인 사람들 위로 붉게 가라앉는 노을을 어떻게 등질 수 있단 말인가. 풍경이 주는 압도감에 심장도 두근거렸다. 꺼낸 책을 고스란히 가방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하염없이 노을 지는 센트럴파크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아직 독서 로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장소가 하나 남았다. 바로 뉴욕 공립 도서관이다. 뉴욕 공립 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서관으로 국적 상관없이 모두가 열람하거나 관광할 수 있는 명소다. 하지만 딱 한 곳이 관광객에게 막혀있는데 영화 <스파이더맨 1>의 배경으로 나온 메인룸인 ‘로즈 리딩 룸(the rose reading room)’이다. 관광객에게는 투어 시간에만 개방되고, 나머지는 실제로 공부하거나 책 읽거나 노트북 작업하는 현지인만 들어올 수 있다. 내가 노린 곳이 바로 관광객인 나에게 제한되어 있는 ‘로즈 리딩 룸’이었다. 이 열람실에는 수천 권의 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길쭉한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높은 층고를 비추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뽐낸다. 각자의 일에 열중하는 뉴요커 사이에 자연스럽게 독서하며 그들과 한데 어우러지고 싶었다는 건, 작은 이유다. 관광객에게 제한된 곳을 뚫어보고 싶다는 삐딱한 마음이 제일 컸다.      

관광객과 뉴요커를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찾아봤다. 뉴요커들은 국적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동네를 걸어도 사진만 찍지 않는다면 다 주민 같다. 무슨 서류라도 필요하나 했더니, 로즈룸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이 느낌으로 판단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책을 보란 듯이 들고 있으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꿀팁을 봤다. 입장할 때, 경비원에게 건넬 말 또한 중요하다. 들어가도 되냐는 말보다 두꺼운 책을 보여주며 여기서 공부해도 되는지를 물으라는 것.      


“Can I read a book here?”

“Can I study here?”

“I’m going to do some writing.”      

혹시 몰라 인터넷에서 찾은 적당한 말은 다 외워갔다. 긴장된 마음으로 뉴욕 공립 도서관에 입장했다. 1911년에 개관한 뉴욕 공립 도서관은 그야말로 해리포터의 촬영지 같았다. 아치형 천장과 기둥, 벽화 등 신비로운 고전 속 성을 걷는 기분이었다. 3층에 올라가자 로즈룸 입구가 보였다. 역시 입구에 관광객을 제한한다는 팻말과 함께 경비원이 서있었다. 가방에서 책을 비장하게 꺼냈다. 미국에서 읽으면 재밌을 거 같은 <빌브라이슨의 발칙한 미국학>이었다. 글자가 한국어로 쓰여 있어도 미국 국기는 알아보겠지 싶어서, 표지가 잘 보이게 들었다. 침을 꼴깍 삼키며 경비원에게 다가갔다. 그 와중에도 주위에서 관광객들이 입구에서 메인 룸을 구경 중이었다. 그들과 내가 달라 보일지 불안했다. 뚝딱거리며 묻는 말에 경비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근엄했던 표정이 한결 풀어지며, 팻말을 치우고 입구를 열어줬다.      


“Sure.”     


허무한 안도감이 들었다. 정확하게 JFK공항의 입국심사에서 들었던 기분과 겹쳤다. 햇빛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자리에 앉았다. 다양한 연령대의 뉴요커들이 각자의 작업에 열중했다. 조용히 의자를 빼고, 책을 펼쳤다. 책에 집중한 척을 10분 정도 하니, 몸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책은 미국의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바로 눈앞에서 미국이 펼쳐지고 있는데, 책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용히 덮었다. 도서관을 구경하다가, 바로 밖으로 나갔다. 책은 일상에서 실컷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뉴욕은 지금만 존재한다.     

 

여행에서의 독서는 여행지를 등지겠다는 것과 같다. 그 뒤로 여행 갈 때, 책을 빼고 갔더니 가방이 훨씬 가벼워졌다. 비워진 자리는 여행으로 채우자는 마음이다. 


“(재)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 2024년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지원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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