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은 독자의 경험을 불러온다.
글방에서 동료들은 서로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만 알고 있다. 필명과 글방에 오게 된 계기가 전부다. 글 쓰고 합평하는데 2가지면 충분하다. 그 외에 정보는 시간과 관계에 맡긴다. 나이와 직업을 밝히지 않은 채로 끝나는 모임도 더러 있다. 반면에 글방 진행자인 나는 첫 소개 시간에 모든 걸 밝혀야만 한다. 어느 모임에서나 자기소개를 식은땀 흘려가며 해왔던지라 해도 해도 적응되지 않는다. 침을 꿀꺽 삼키고 일어나 시작한 내 소개는 책방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부터 밝힌다. 처음 책방에 온 동료들은 내가 사장님인 줄 알고 입장하자마자 공간에 대한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책방 사장님의 정성을 뺏고 싶지 않은 마음에 냉큼 수정한다.
“아 저는 여기 책방에 얹혀서 글방을 열고 있어요. 사장님은 따로 계세요.”
공간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전문성을 가늠할 수 있는 이력을 말해야 할 차례다. 이때마다 어깨가 움츠러들고 목소리가 작아지는 건, 그날 때문이다. 책방 ‘레나의 그림책 정원’에서 새로운 글방을 열게 된 첫날이었다. 4명의 동료 앞에서 흔들리는 성대를 겨우 부여잡고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저는 작가 지은심이고요. 낮에는 직장인이고, 저녁에는 글방을 열어요. 책은 3년 전에 가족 에세이 딱 한 권을 출간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글방을 통해서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를 공부하고 있어요.”
내 소개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껌을 짝짝 씹던 한 동료가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는 모양이었다. 긴장감이 돌았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삐딱하게 앉은 그녀의 자세가 시한폭탄처럼 조마조마했기 때문이었다. 껌 동료가 손을 들었을 때, 못 본 척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작은 규모 속 그녀의 존재는 뚜렷했다.
“작가님 소개가 너무 짧아서요.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러면 글쓰기를 전공하셨어요?”
“아니요.”
“그러면 상을 받으신 적은요?”
“없습니다.”
김이 빠져버렸는지 껌 동료의 태도가 더 시큰둥해졌다. 단답형 대답에 변명이라도 몇 마디 더 붙여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쿨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이 그런데 어쩌겠는가. 나는 과자도 과대포장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이라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껌 동료는 첫날 이후로 나오지 않았고 여운은 길었다. 작가라고 소개할 때마다, 껌 동료의 질문이 들리는 듯했다. 그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부단히 글을 썼다. 작가는 글로 맞서야 하는 법. 노트북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쓸 때마다 작가로 살 수 있는 날이 하루씩 연장된다는 주문을 걸었다. 다행히, 내 부실한 이력을 대체할 만한 글을 썼는지 다른 동료들은 나를 아직 ‘작가’로 불러주고 있다.
내가 이토록 작가 타이틀에 목말라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투잡 작가에서 전업 작가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6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에게 본업의 기준은 월급이 아닌 주체성이었는데 타인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퇴사 후의 계획을 묻는 이들에게 퇴사하고 글만 쓰고 싶다고 했더니 다들 걱정만 하기 바빴다.
“어떻게 먹고살려고 해?”
“글로 돈 얼마나 버는데?”
내가 다닌 회사는 SNS 콘텐츠를 전문으로 만들었다. 타인을 홍보하기 위한 콘텐츠를 정성스럽게 만들다 보면, 한 가지 욕구가 자꾸만 튀어나왔다. 온전히 나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욕구. 이런 욕구가 글방에도 고스란히 티가 나는지, 하루는 글감이 ‘내 손님이 되어라’였다. 동료들의 노동일지가 궁금했다. 나처럼 퇴사를 앞둔 사람이 더 있었으면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 때문이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동료가 ‘아르바이트 일대기’를 다룬 글을 써왔다. 제목은 ‘노동의 목적’이었다. 글쓴이는 다수의 아르바이트를 경험해 본 결과, 돈에만 목적을 두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자연스레 든다고 했다.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돈과 함께 다른 목적도 곁들였을 때, 결국엔 더 오래 일할 동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글방 운영자라는 걸 깜빡 잊고 ‘맞습니다. 언니.’라고 할 뻔했다. 아르바이트와 결론에 대한 연결이 약했지만, 내 앞날을 걱정하는 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이었다. 몇몇 동료들은 막상 일해보면, 다른 목적을 고민할 여유 따위가 없다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쓴이를 어리게 바라보는 시선도 느껴졌다. 글 쓰겠다는 나와 돈 벌 걱정이나 하라는 타인과의 구도를 보는 듯했다. ‘노동의 목적’에 동의하고 위로받은 사람으로서 버선발로 옹호해주고 싶었지만, 맞다 아니다를 따지는 게 내 역할이 아니었기에 담백하게 말을 꺼냈다.
“이 글을 읽고 돈과 곁들일 노동의 목적에 대해서 고민해 봤어요. 저는 주체성인 것 같아요. 회사에서 주어진 일만 수동적으로 처리하니깐 애정을 갖기가 어렵더라고요. 사실, 오랫동안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꾸역꾸역 몇 년을 끌었어요.”
동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로 최소한만 아는 동료들 앞에서 너무 큰 중대 발표를 해버린 걸까.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말하고,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글 쓰는 제가 신기했어요. 한 번은 온종일 저를 위해서 주체적인 시간을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며칠 전에 퇴사했어요. 회사 그만두고 늘 걱정만 받았는데 저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글을 발견해서 정말 반가웠어요.”
합평하다 보면 타인의 글에도 나를 꺼내놓게 된다. 좋은 글은 독자의 경험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내 마음을 오롯이 글에 가져다 놓았을 때, 밑줄을 긋고 싶어진다. 정적은 잠깐일 뿐, 눈 깜빡할 사이에 나의 퇴사 고백은 다음 합평에 묻혀버렸다. 어쩌면 동료들은 최소한의 정보로 연결된 게 아니라 기분 좋은 무심함으로 연결된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