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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글방지기

선을 정직하게 지키고서는 글을 못 쓴다.

by 지은심

지난 15일, ‘글방의 세계’ 포럼을 다녀왔다. 글방의 시초인 어딘과 그녀 슬하의 이슬아 작가, 안담 작가가 진행을 맡았다. 200명의 청중석이 꽉 찼고, 예상시간을 한참 초과해서 막을 내렸다. 마지막 질문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소심한 나도 질문 하나라도 던져보기 위해 부단히 손을 들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다들 나만큼이나 질문에 진심이었다. 좀 더 민첩하게 손들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사실은 질문하는 척하면서 투정을 하고 싶었다. 동료들이 글쓰기를 좋아해주지 않는다는 투정. 작가님들 눈에도 내 얼굴에서 투정의 기운을 눈치챘는지 내 눈을 한참 피했다.


글쓰기가 즐거울 수 없다는 건 얼마든지 인정한다. 나도 글 한 편을 쓰면서 일주일 내내 불편했다. 밥 먹으면서도, 자면서도, 산책하면서도 글 써야 한다는 생각에 온전한 일상을 보낸 적이 언젠지 모르겠다. 오죽했으면 어딘이 고통스러운데 계속 쓰는 건, 업보라 말하겠는가. 업보고 운명이라 생각할수록, 글쓰기를 설득할 수 있는 말이 줄어든다. 더욱 슬픈 순간은 동료들이 쓰기를 뒤로 미뤄두었다고 느낄 때였다.


동료들은 쉬고 싶다는 신호를 다양하게 보낸다. 한번은 마감 시간이 한참이 지나도 글을 보내지 않는 동료가 있었다. 연락했더니 글쓰기 마무리가 되지 않아, 좀 더 써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꼼꼼하게 써주다니, 고마운 마음과 함께 기대가 한껏 올라왔다. 글방 날, 지각 동료가 꺼낸 글에 모두의 표정에서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수기로 몇 자 써온 것이었다. 심지어, 글 마무리가 되지 않은 아주 짧은 글이었다. 마치 엄마가 친구랑 오래 전화하다가 상대의 말을 무심코 따라 적는 메모 같았다. 수기라도 합평을 안 할 수는 없기에, 모두가 지각 동료의 글에 꾸역꾸역 합평을 이어갔다. 다음에는 글 한 편의 가이드라인을 촘촘하게 안내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도 몇 마디를 보탰다.


“글방에는 독자가 있는 글이 먼저입니다. 이 글은 마치 혼자 쓴 메모 같아요. 이게 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로서 어떤 합평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재료가 몹시 부족해요. ”


어떤 동료는 의식의 흐름대로 휘갈겨 쓴 초고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요즘 너무 바빠서, 2시간 전에 급하게 썼어요. 근데 나름 잘 써지더라고요.”

“의식의 흐름이 그대로 느껴지는 글의 전개네요. 뜬금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일상과 글쓰기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건, 글방의 또 다른 과제다. 내 일과에서 얼마나 글쓰기에 양보할 것인지에 따라 글방의 질도 달라진다. 회사를 6년간 다녀본 나 또한 시간을 글쓰기에 할애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근무 시간 틈틈이 끄적이느라 눈치 보여 혼났다는 동료를 만나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글쓰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준 경험을 기꺼이 해준 것이니깐.

동료들에게 글쓰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해달라는 말을 선뜻 할 수 없다. 내가 동료들의 삶을 책임지거나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선을 지키려 애 썼고, 그들의 일과에는 글쓰기와 함께 내가 한없이 작아졌다. 동료들이 퇴근하고 오기 좋은 시간, 퇴근하고 약속이 가장 없는 평일에 글방 날짜를 잡았다. 한주에 한 편씩 쓰던 규칙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동료들의 의견에 따라 격주로 늘렸다.


느슨해진 글방에 팽팽한 긴장감을 줘야겠다고 결심한 건, 다름 아닌 은유 작가님 때문이었다. 은유 작가님의 수업을 받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첫날, 작가님은 충격적인 말로 수업의 포문을 열었다.


“10주간 여러분의 일상에서 글쓰기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속으로 한껏 놀란 나와는 달리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평일 오후 2시에 시작하는 수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이 정도 요청은 당연했다. 현재 4회차 수업까지 출석률이 95% 이상에다가 글과 함께 다른 과제도 모두가 해온다. 작가님의 비결은 선 넘기가 아니었을까. 선을 정직하게 지키고서는 글을 못 쓴다. 동료들에게 시간 내라는 부담도 주고, 글 안 쓰면 합평도 없다는 협박도 좀 해야 한다. 그동안, 물렁한 글방지기였던 내가 복병이었던 것이다.

다시, 포럼으로 돌아와 누군가 글방의 필수 요건을 물었다. 안담 작가님이 첫 번째 요건으로 제시한 건 이것이었다.


“글방에 오가는 사람들은 느슨해도 되는데, 글방지기는 느슨하면 절대 안돼요.”


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미세하게 흔들어 그건 아니라고 조용히 말했다. 200명의 청중들이 글방에 느슨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집 가는 길, 다음 기수를 위한 홍보 문구 중 첫 문장을 비장하게 고쳐 썼다.

‘글쓰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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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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