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진 않지만 확신을 주는 사람
언젠가 함께 일하던 프로젝트 매니저가 말했다. 하고 있는 일에 비해 주목 받지 못하고 그만한 대우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해 걱정해주는 말이었다. 사내에서 능숙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자기 영역을 확실히 다지고 있는 디자이너를 예로 들며 자기를 포장하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했다.
여러 회사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해오면서 내가 나를 어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때로는 실력보다 얽혀있는 관계가 승진과 연봉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팀의 리더가 세를 늘리기 위해 전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을 데려와 특혜를 주거나 자신의 성향과 잘 맞는 싹싹한 팀원에게 승진 기회를 먼저 주는 것은 어느 조직에서나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나도 한때는 수많은 사회 초년생이 착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하면 알아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용히 제자리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자칫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과소평가당하고 억울하게 뒤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그래요, 저는 내향적인 사람입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입사 동기 중에는 퇴근 후 언제나 술 약속이 잡혀있는 친구가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그 친구는 여러 사람과 함께 있어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진정한 외향인이었다. 말투와 표정 그리고 적극적인 태도는 누구라도 그를 일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어도 어리숙한 초년생 티를 벗지 못하고 있는 나와 달리 노련한 경력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던 그는 몇 년 후 탁월한 인맥 관리와 면접 기술을 바탕으로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회사로 이직해 커리어를 쌓아갔다.
술이라면 근처에 가는 것도 싫어하고 2~3명이 소수로 모여 조용히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고 어쩌다 모임이 있는 날이면 에너지가 방전되어 집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지듯 누워버리는 나는 사실 그 친구가 부러웠다. 아니, 정확히는 불안했다. 어쩐지 뒤처지는 것만 같고 중요한 정보나 인맥에서 소외되는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조용히 한발 뒤로 물러서 있는 성향은 조직이 요구하는 이상적인 인재상과는 거리가 있다. 외향적인 사람을 롤모델로 삼기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나는 언제나 외향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껴왔다. 또한 인간관계를 넓히고 대외적으로 자기 어필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내향적인 사람은 실력을 인정받는 전문가가 될 수 없는 걸까?'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절반은 내향적인 사람이라는데 본성을 거슬러 외향적인 사람을 롤모델로 삼아야만 하는 표준은 누가 정한 걸까?'
'인맥을 만들려면 반드시 많은 사람을 만나 많은 얘기를 하는 방법밖에 없는 걸까?'
'내향적인 사람도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을까?'
한 움큼의 세월이 지나고 경력이 이만큼이나 쌓였어도 나는 여전히 내향적인 사람이다. 디자이너로 살아온 시간 내내 타고난 성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일하고 소통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왔다. 그래서일까. 좋아하는 일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확신을 주는 사람
오랜 세월 내향성은 외향성의 반대 값으로 낙인찍혀왔다. 외향성은 곧 기본값이고 여기서 무언가 빠져있는 상태를 내향성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향성은 외향성의 결핍이 아니다. 서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향이 다를 뿐 내향성은 외향성과 동등한 또 하나의 성향이다.
내향성은 다양한 오해로 뒤덮여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수줍음이 있다. 수줍음과 내향성을 모두 가진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그 두 가지가 같은 것은 아니다. 내향인 중에 수줍음 없이 대인관계가 자연스러운 사람이 있고 외향인 중에도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 있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도리스 메르틴은 이성과 감성 그리고 대인관계에 대한 자신감 여부에 따라 내향인을 네 가지 유형(주도형, 섬세형, 비범형, 은둔형)으로 분류한다. '내향인 DNA 모델'이라 부르는 이 분류 방식은 한 사람이 하나의 유형에만 속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가장 강하게 두드러지는 대표 유형에 나머지 성향이 섞여 있을 수 있다.
내향성의 유형과 개인사가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 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내향인이 만들어진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자기 전공에 관해서만 빠삭한 괴짜 전문가, 지독하게 예민하지만 감성이 풍부한 예술가 등 내향인의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하다.
내향인에게는 외향인에 비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 정확한 상황 분석력
- 사안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능력
- 남의 말에 사려 깊게 귀 기울이는 능력
- 갈등을 지양하는 성향
- 체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능력
- 세부적인 사항까지 파악하는 능력
- 손에 잡힐 만큼 확실한 결과물을 제시하는 능력
- 자주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능력
-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능력
- 비밀 준수 능력
- 실제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포장하지 않는 겸손함
도리스 메르틴 <혼자가 편한 사람들> p.15
내향인은 자신의 타고난 성향을 성장의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다. 신중함, 진솔함, 자주성, 예리함은 화려하진 않지만 믿고 맡길 수 있는 확신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소중한 자질들이다.
네트워크 안의 빈 틈을 메우는 브로커
나는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팀원, 새로운 클라이언트와 일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산출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업무 특성상 디자인 PL(Project Leader)은 안팎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프로젝트 초반이면 언제나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파견을 나가면 클라이언트에 따라 모니터를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디자이너의 자리를 배치하는 경우가 있다. 지나다니면서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얼마나 '잘' 그리고 있는지, 어떻게 일을 배분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때때로 매니저에게 '이 중요한 부분을 PL이 하지 않고 PA에게 시키는 이유가 뭐죠?'라고 얘기해 압박을 주기도 한다. 상당히 무례하고 황당한 일이지만 서로 간의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프로젝트 초반에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혹시 같은 팀의 기획자나 디자인 PA(Project Assistant)가 전에 같이 일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PL이 어느 정도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일정 시간을 거쳐 인정받아야 한다. 초반에 나를 어떻게 증명하느냐에 따라 프로젝트 중후반의 흐름이 달라진다.
내가 오래전 '함께 일하고 싶은 디자인 전문가'라는 정체성을 설계한 이유는 이런 업무 특성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기획부터 개발까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사이클의 한가운데에 디자인이 위치한다. 그 때문에 클라이언트가 가장 쉽게 접근해 의견을 낼 수 있는 디자인 파트의 역할은 중요하다. 디자인에서 혼선이 생기면 이후 진행 일정과 프로젝트 전반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나의 프로젝트는 여러 포지션의 수많은 사람들이 협업하는 인적 네트워크다.
리더십과 혁신을 연구하는 사상가 데이비드 버커스는 책 <친구의 친구>에서 네트워크 안에 존재하는 구조적 빈틈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사람들은 보통 촘촘하게 짜인 클러스터(Cluster, 비슷한 사람으로 구성된 집합체)의 내부에만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클러스터와 클러스터 사이에는 빈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틈을 메우고 연결하는 사람을 브로커(Broker)라고 말한다.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각 포지션(클러스터) 사이에 다양한 갈등 상황이 일어난다. 서로 다른 회사 사람들이 협업하는 상황이라면 물론이고, 하나의 회사 안에서 팀을 꾸려 프로젝트를 하더라도 서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이때 디자이너는 네트워크 안에서 브로커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프로젝트의 맥락을 파악하고 클라이언트, 기획자, 퍼블리셔, 디자인 PA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며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면, 그렇게 커뮤니케이션 상의 빈틈을 메울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의 존재감은 저절로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내향인이 가진 특성 때문에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클러스터 사이를 오가며 서로를 연결해주는 것은 단지 브로커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조직에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다.
데이비드 버커스 <친구의 친구> p.112
장점을 살려 일을 하다 보면 아주 가끔씩 "세상에 디자이너는 많지만 진선 씨 같은 디자이너는 하나밖에 없는걸."이라는 말도 듣게 되고, "디자이너야 많지. 근데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어서 연락한 거야."라는 말도 듣게 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상대방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매 순간 생각한다.
웹의 시대, 내향성이 빛나는 느슨한 네트워크
언제부턴가 나는 좀 더 넓은 범위에서 브로커의 역할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두 가지 측면에서 틈을 메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하나는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후배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유용한 정보를 나눠 주는 것이고, 그다음은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에게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을 전하는 것이다. 초보자와 숙련자, 디자이너와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 이렇게 서로 다른 집합체 사이의 틈을 메우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지향하는 세 번째 정체성인 '영감을 주는 사람'의 구체적인 설명이다.
내향적인 사람인 내가, 별다른 인맥을 갖지 못한 내가, 앞에 나서서 말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지 못하는 내가 과연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미처 말로 다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글로 풀어보기로 했다.
내향인을 연구하는 수전 케인과 도리스 메르틴은 온라인이 내향인들의 대외적인 소통 창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내향인들에게 온라인은 자기 속도에 맞게 다른 사람의 말에 끼어들지 않고도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오픈된 네트워크다.
이메일과 블로그, 슬라이드셰어 등 새로이 등장한 '고마운' 매체들 덕분에 이제 생각을 완전히 정리한 다음에 누군가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다. (...) 정리된 생각을 발표함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내향인은 이제 자신의 강점, 즉 본질에 집중하는 능력, 성찰력, 장기적 안목, 신중함, 겸손함, 차분함 등을 애써 감추지 않아도 된다.
도리스 메르틴 <혼자가 편한 사람들> pp.326~327
내향적인 사람들은 (...) '진짜 자신'의 모습을 온라인에서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며 (...) 디지털로 소통하는 기회를 환영한다. 200명이 앉아 있는 강의실에서라면 절대로 손을 들지 않을 사람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2천 명, 아니 200만 명이 보는 블로그에 글을 쓰기도 한다. 낯선 사람 앞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데 어색해하는 바로 그 사람이, 온라인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이 관계를 현실 세계로 넓히기도 한다.
수전 케인 <콰이어트> p.109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소소하지만 유의미한 변화들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글에서 인용한 책을 사서 읽고 있다는 피드백, 얼마 전부터 독서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피드백, 글쓰기를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는 피드백을 받는다. 알고 있는 글쓰기 강좌가 있는지 추천해 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생전 처음으로 블로그를 개설해 글쓰기를 시작했다며 링크를 보내준 사람도 있었다. 가장 기뻤던 피드백은 "평소에 자주 해주시던 말인데 글로 보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고 이해가 더 잘 됐어요. 고맙습니다."라는 동료의 말이었다.
얼마 전 나의 내향성을 걱정해줬던 프로젝트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 쓰고 있는 글 잘 보고 있어. 회사 사람들이 자꾸 진선 씨 소식을 묻더라고. 드디어 스스로를 증명하는구나!"
어쩌면 글이란, 조용하지만 강하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일지도 모른다.
친구,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는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온라인에서 느슨하게 연결된 사이에서도 그렇다. 혹시 우연히라도 누군가 글을 통해 나를 알게 되었을 때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자극을 주는 친구라고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친구의 친구에게 공유되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당신이 누구를 아는가'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영향을 끼치고, 이는 다시 '당신의 친구의 친구 중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간에 말이다.
데이비드 버커스 <친구의 친구> p.261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 본다.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지 고민하는 내향적인 사람도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본다. 무한히 연결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느슨한 네트워크의 힘을 믿는다면.
참고 도서
데이비드 버커스 <친구의 친구>
수전 케인 <콰이어트>
도리스 메르틴 <혼자가 편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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