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사소한 걱정을 앞서 떠안는 편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마음이 먼저 기울고, 불안은 그 뒤를 따라온다.
모든 일이 계획 안에서 움직이기를 바라고, 그 계획이 어긋나는 순간 감정이 앞서 튀어나온다.
이미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기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따지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이런 성격의 나에게 가장 취약한 지점은 건강이다.
병원 예약 문자를 받는 날이면, 아직 아무 일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긴장한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다리는 이유 없이 떨리고, 진료실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가 먼저 돌아간다.
결과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마음은 이미 한참 앞서 달려가 있다.
우리 집안에는 암이라는 가족력이 있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위암으로 쉰둘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췌장암으로 쉰넷, 친정 아빠는 뇌종양으로 쉰여섯에 세상을 떠나셨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나는 집에서 투병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고,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아빠의 발병과 투병과정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에게 건강에 대한 불안은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몸에 남아 있는 기억에 가깝다.
병원 복도 특유의 냄새, 검사가 끝나고 나오는 보호자의 표정, 설명을 기다리는 짧은 침묵들. 그런 장면들이 사소한 신호에도 불쑥 떠오른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음속에서는 이미 불행이 시작된다.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지금의 일상은 어디까지 무너질까.’
질문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나는 어느새 불행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 질문들은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나를 지치게 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실제처럼 견디느라, 병원을 다녀오는 날이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소모된다.
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과정을 통과의례처럼 반복한다.
내 인생의 계획에 없던 첫 번째 불행은 아빠의 부재였다.
부모 두 분을 모두 암으로 잃은 아빠는 누구보다 건강을 관리했지만, 결국 그 대물림을 피하지는 못했다.
스물아홉에 아빠를 보내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의외로 단순한 '한 문장'이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과거를 오가며, 그때 이랬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반복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에 아빠가 아프게 된 건 아닐까.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머리까지 MRI를 찍어봤다면 어땠을까.
결혼을 조금만 늦추고, 아빠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달라졌을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질문들을 놓지 못했다.
되돌릴 수 없는 장면들을 붙잡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동안, 슬픔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아빠를 잃은 일 위에, 또 하나의 피로를 얹고 있었다.
최근 텔레비전을 켜다 우연히 박미선 씨를 보았다.
한동안 방송에서 모습을 감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가 유방암 투병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날에서야 알았다. 짧게 자른 머리로 화면에 선 그녀는, 항암 치료로 빠진 머리카락을 숨기기보다 짧은 머리에 어울리는 수트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삶의 속도를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그 말을 들으며 문득 낯선 감정이 들었다. 애써 의미를 붙이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고, 이미 일어난 일을 그대로 두는 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며칠 전, 차를 긁어 정비소에 간 적이 있었다.
구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차인데 아끼며 몰던 차에 흠이 생겼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속상한 마음에 괜히 이런저런 말을 하소연하듯 늘어놓았다.
그때 정비소 아저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늘 새 차일 수는 없어요. 박기도 하고, 긁히기도 하죠. 다 그런 거예요. 이 정도면 표도 안 나고 그냥 타도 되겠는데요?”
위로도 설명도 아닌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저 “다 그런 거예요”라는 말로, 이 일이 나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긴 일로 놓이는 순간이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 나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더 이상 ‘왜’라고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용만 더 들 뿐 굳이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아저씨의 말에 힘입어, 차를 정비소에 맡기지 않고 그대로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시동을 끄고 차 문을 닫으며 다시 한번 차에 난 흠집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빛을 받으면 보이고, 각도를 바꾸면 사라지는 정도의 자국에 불과했다.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문질러 보니 살짝 거칠고, 아주 조금 안으로 들어간 느낌이 전부였다.
희한하게도 더 이상 크게 속상하지가 않아서
“뭐, 이 정도면 그냥 타지 뭐.”
혼잣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차 문을 닫고 집으로 올라가며 문득 알았다.
이미 생긴 일은, 이유를 묻지 않아도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꿔 보기로 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대신에 이미 생겨난 일을 안고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