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첫 아이를 가진 지 거의 만삭이었을 무렵, 나는 처음으로 삶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정밀검진을 위해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말만 믿고 있었는데, 아빠는 뇌종양 진단을 받으셨다. 임신 중인 내가 놀랄까 봐 그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것도, 너무 해맑은 내 얼굴을 보다 못한 고모가 대신 알려주었다는 것도 모두 나중에 알게 된 일이다. 그날, 내가 서 있던 공간이 잠시 기울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출산휴가를 내고 아빠가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 매일같이 갔다. 서툰 솜씨로 반찬을 챙겨 가면서도, 사실은 그저 아빠를 보고 오는 길이 필요했다. 몸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전철을 타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그 길은 이상하게도 여행을 떠나는 길처럼 느껴졌다. 아빠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세상 걱정 없는 철부지 딸이었다.
곧 아이를 낳고 조리원에 들어갔다. 어설픈 엄마가 되어 처음 겪는 일들 앞에서 매일 허둥댔다. 새벽마다 울리는 수유 콜, 거울 속에서 낯설게 변해 가는 몸, 밥 먹고 젖 먹이는 일로 채워진 하루. 그 모든 것이 나를 우울하고 서글프게 했다. 어느 날, 아빠에게 걸려 온 전화 앞에서 나는 그만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암 투병 중인 아빠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나의 힘듦만 쏟아냈다. 나중에야 아빠도 그날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는 예후가 좋지 않은 병으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우리 집에서 병원까지 통원하셨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너무 바빴다. 부모님이 힘들게 오가고 계신다는 사실보다, 두 분이 우리 집에 함께 계신다는 점이 더 좋았다. 누구의 아내도, 아이의 엄마도 아닌, 다시 엄마 아빠의 딸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몇 주간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대구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내일 일곱 시쯤 출발하자”는 부모님의 대화를 들으며 나도 그 시간에 맞춰 일어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새벽 수유 뒤 선잠을 자다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이미 일곱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허둥지둥 방문을 열자, 방은 덩그랗게 비어 있었고 이불만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나는 개어진 이불 옆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마음이 텅 비고 ,그 빈 공간을 비집고 찬 바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몇 달 뒤, 아빠는 쉰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건강검진을 위해 서울의 큰 병원에 오신 줄로만 믿었던 그때처럼, 나는 아빠가 병을 앓고 계셔도 오래 사실 거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다. 처음 겪는 시련 앞에서, 나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늘 희망뿐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난생처음으로, 내 뜻대로도 희망한 대로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아빠를 보내고 나서도 내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다 보니, 아빠가 여전히 그곳에 계신 것만 같았다. 내 손이 필요한 어린 아기를 돌보느라 하루는 여전히 정신없이 흘러갔다. 장례식장에서부터 그 이후까지, 나는 눈물을 제대로 흘려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햇살 좋은 겨울날, 빨래 건조대에서 양말 한 짝을 발견했다. 아빠의 양말이었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대구로 돌아가시던 그날 아침, 서두르시느라 두고 가신 것이었다.
그제야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아빠가 정말 떠났다는 사실이, 그 양말 한 짝을 통해 내 일상 속으로 도착했다.
아빠의 이별은 그렇게, 봄처럼 따뜻했던 어느 겨울날, 아주 사소한 물건 하나로 나를 찾아왔다. 지금도 나는 그 양말을 마치 아빠를 보듯 조용히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