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들끼리의 가을소풍이 결정되었다. 글램핑장을 미리 예약을 하고서도 정말 우리 넷이서 갈 수 있을까, 하물며 글램핑을, 더구나 1박의 외박을!? 하고 솔직히 걱정이 되었다. 누구 하나 중간에 가족들 때문에라도 '나 못가'하고 빠지게 된다면 어렵게 잡은 일정이 취소될까 봐서. 행여나 빠진 사람이 생긴다면 너무나 서운할 일이라서. 그런데 진짜로 가게 되었다. 가기 일주일 전부터는 얼른 떠나자며 단톡방에서 서로의 설렘도 함께 공유했더랬다. 회사에서 업무로 힘들다가도 잠깐씩 다가오는 여행 생각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었다.
여행 당일은 금요일이라 나만 빼고 나머지 멤버 언니들은 모두 출근을 했다가 점심때쯤 출발을 한단다. 오랜만에 자유를 아침부터 마음껏 만끽할 여유도 없는 워킹맘들이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에 제일로 바쁜 아줌마들이 아닌가. 남편이 무슨 배짱으로 너 혼자 출근을 안했냐고 하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그저 나는 출발 전부터 캠핑 가는 것만 오로지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사는 곳이 각자 달라서 강원도 춘천 글램핑장으로 둘씩 짝을 지어 모이기로 했다. 입실이 오후 3시여서 여유가 있었다. 이제 10월 초인데도 날씨가 무슨 변덕인지 곧 추워진다고 연일 난리여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추워지기 전에 후딱 다녀올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도 강원도는 밤엔 추울 테니 불멍이라도 하려면 다들패딩점퍼를 챙기라고 왕언니가 신신당부를 했다. 캐리어 한쪽 면에 패딩 점퍼를 넣으니 고작 1박 하는 일정에 짐이 넘쳤다.
먹거리는 여의도 언니들이 다 챙기고 운전도 여전히 내 몫은 아니라서 혼자 뭘 준비하나 고민하다가 와인과 쥐포 안주를 챙기기로 했다. 언니들은 소맥(소주와 맥주) 파에 나역시도 여전히 와인맛은 잘 모르지만 글램핑에서 고기 먹을 때 와인 한잔 빠질 수 없지 싶었다. 아차, 유리잔을 가지고 갈 수 없어서 부랴부랴 캠핑용 플라스틱 와인잔을 구매했다. 남편이 감성 전구는 왜 안 샀냐고, 가게 되면 불멍(모닥불 멍하게 바라보기)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카카오톡 프로필로 올리게 요즘 유행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가족들과 함께 갈 수 없어 내심 딸아이에게도 미안했는데 이번 사전답사를 계기로 다음번엔 꼭 가자고 다짐을 해두었다. 가족들을 떠나 우리끼리의 자유시간인데도 여전히 남는 가족이 눈이 밟히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으휴 아줌마들은 다 그럴까.
글램핑장에 하남 언니(나이 서열상 둘째 언니)와 여유 있게 도착했다. 푸른 하늘과 때 이른 가을 단풍이 여기 아주 잘 왔어~ 하는 것만 같았다. 뒤이어 여의도 언니들까지 모두 모였다. 입실시간까지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하남 언니가 다음날, 그러니까 토요일 오전에 둘째 딸 대학 수시면접 때문에 저녁에 서울로 돌아가야한 다고 한다. 캠핑 날짜를 미리 잡았으나 면접일이 뒤늦게 정해졌다. 그래서 드넓은 잔디밭을 안주삼아 서둘러 사온 맥주를 텄다. 술을 많이 먹여서 운전을 못하게 하자고 일찍 떠나는 언니에게 서운함을 표현했지만 자식에게 신경 쓰이는 엄마 마음을 다들 너무 잘 아는지라 장난만 치고는 다들 마음으로 이해해준다. 뭐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우리 인생이다. 그러니까 더욱 재미가 있는 법이겠지.
이곳 캠핑장은 리조트가 있는 곳에 겨울엔 스키장으로 사용되는 부지 한편에 소규모로 글램핑 사이트를 구축한 곳이다. 하여 한쪽엔 리조트가 한쪽엔 글램핑이 공존하고 있는데 약간 어색한 분위기도 있었다. 좋은 점은 리조트 내의 사우나 쿠폰이 서버스로 따라와서 아침에 말끔하게 씻고 집에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리조트를 지척에 두고 왜 글램핑으로 사서 고생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화장실도 멀고 씻기도 불편하고 요리하나 해먹으로면 개수대가 있는 곳까지 수차례 왔다 갔다는 기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램핑이나 캠핑이 주는 확실한 매력이 있다. 그건 바로 앞에 자연이 있다는 것이다. 한 발만 내밀면 바로 잔디밭이 있다는 것이고, 푸른 하늘 배경에 흰 구름이 더 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높은 하늘을 원 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이고, 까마귀가 내 귀 지척에서 우는 바람에 아침에 너무 일찍 깨었지만, 새벽에 내린 비로 안개 모자를 쓴 산을 바로 한 걸음만 나와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나에게 그리고 우리 서로에게 더 집중할 수 있다는 말이며, 모두가 더 친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캠핑을 와서 알게 된 게 있다. 요리는 거의 왕언니가담당했다. 고기 굽는 것도 다음날 남은 삼겹살에 밥을 볶는 것도 다 왕언니 해주셨다. 어딜 가나 맏언니는 먹을 것을 책임진다. 셋째 언니는 정리 쟁이다. 어질러져 있는 꼴을 못 보고 자주 치웠다. 같이 근무한 적도 있는데 왜 몰랐지. 흠흠. 나는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휴대용 부르스타에 부탄가스도 하나 제대로 넣지 못하는 허당이 가 되었다. 야심 차게 해장용으로 라면을 끓였는데 물을 너무 많이 넣었다. 그나마 깻잎을 넣어 향이 좋아 만회했다. 캠핑 중에 뭐든 도움이 되고 싶은 나는 '이상하다. 나 이거 잘하는데.'를 자주 내뱉었다. 딸이 넷인 우리 집에선 맏이 인 나는 내가 제일로 잘하는데 언니들하고만 있으면 갑자기 진짜 막내가 된다.
하남 언니는 이날 숯불 옆에서 고기를 열심히 구워주고 정작 본인은 술은 많이 마시지도 못했다. 한밤중에 운전해서 가다가 무서우면 다시 돌아올게 하면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그대로 서울로 갔다. 딸을 면접장에 데려다주는 일이 더 무섭고 긴장되는 일이었으므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돌아가는 사람 마음이 몇 배 더 아쉽겠지만 짖꿎은 언니들은 아쉬우라고 다음 날 아침 해장으로 끓인 조개탕을 찍어 먼저 떠난 히님 언니에게 보냈다. 이곳 글램핑장은 불멍을 할 수 없어서 아쉬워하자 언니들은 바비큐 숯불로라도 불멍을 하자고해서 서운해하는 나를 웃겨줬다.
아줌마들 글램핑이 별거 있나. 역시 빠지지 않는 아이들 이야기, 식구들 이야기와 건강이야기로 범벅이 된 기나 긴 수다와 웃음소리 그거면 되었지. 알래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이란 책에서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라고 했다. 결국 새로운 곳에 가면 새로운 생각이 든다는 말이 아닌지.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보려고 새로운 곳에 가지만 결국 내 안의 있는 것들을 재발견하고 온다.
다시 발견되어진 내 안의 새로운 생각은 정말로 우리를 새롭게 하고 일상에 지친 마음은 위로받으며, 우리 사이까지 더욱 친밀해지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그러니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라도 자주 새로운 곳에 다녀야겠다. 더 늦기 전에.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왕언니가 그러신다. "우리 이제 1박 튼 거야? 얼마나 걸린 거지?" 거의 1년이 걸린 것 같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만들고서 다 같이 모여 1 박하기가 참 쉽지가 않았다. 다들 가정에서는 엄마와 아내라는 이름으로 해야 할 임무가 있기에. 게다가 넷이서 일정을 맞추기도 늘 어렵다. 하지만 이 어려운 걸 우리는 또 해낸다. 왜냐, 우린 아줌마니까.
집에 돌아가서는 나는 아이 점심을 차려줘야 하고 다른 언니는 아이들 학원 픽업 가야 하고 해야 할 일들이 미리예약이나 된 것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야심 차게 다음 만남을 계획한다. 다음 달 전사 휴일엔 어디 갈 건데? 얼른 장소 잡아봐~~. 송년회는 호텔에서 할 거지? 하고.
멤버 언니들 사이에게 한참이나 인기가 있었던(훈훈한 남주인공의 외모 덕에 많은 아줌마들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 많았던) 모 드라마(갯마을 차**)에서 고슴도치를 키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하는 말이 인상 깊었다. 뾰족한 가시 때문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지만 친해져서 자신에게 해가 없는 사람이 다가오면 만져도 아프지 않게 고슴도치 스스로 가시를 알아서 눕혀준다는 말.
발톱을 숨기며 지내다가 나에게 해를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발톱을 보이며 으르렁 소리 낼 준비를 하며 사는 많은 현대인들 속에 나도 있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해가 없는 사람에게 가시를 눕혀주는 고슴도치처럼 언제든지 바라만 봐도 가슴속 뾰족한 발톱이 스스로 무장해제되는 사람이 있는지 한 번은 생각해 볼 일다. 그렇다면 같이 더 재미나게 살아볼 일이다. 우리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