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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초대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으로 바람을 쐬러 갈 만한 사이

by 시코밀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사건은 늘 이렇게 예고 없이 오는 것이긴 하다.


그날은 가을이 끝나가는 것이 아쉽기라도 하듯이 파아란 하늘이 사무실 창을 가득 덮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공원엔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이 하늘거리고 햇살도 참으로 가벼웠다. 그날은 나의 상냥한 마녀 군단들과 함께 교외 멋진 곳에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잠도 같이 자기로 한 전날이었다. 마음은 이미 춘천의 캠핑장으로 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행복한 상상으로 나른한 오후를 나른하지 않게 보내고 있을 때에, 우리 팀 김 과장님이 한마디 하신다. '이런 날은 경치 좋은 데로 가서 커피라도 한잔 해야 하는 데 말이야.'라고. 사무실에 있자니 억울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날씨, 그곳이 어디라도 당장 휴가라도 내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 날씨이긴 했다.


그 말을 듣고 대뜸 내가 그랬다. 제가 대신 경치 조오~~ 은 곳에 가서 차 마시고 오겠다고. 그랬더니 김 과장님이 그러신다. '아니 커피는 내가 사줄 수도 있는데.' 남이 들으면 웬 이상한 대화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마음 편하게 농을 던지신지도 몰랐다.


여하튼 그래서 내가 그랬다. '오시면 차만 사실 수는 없을 텐데요.', 그랬더니 '그럼 밥도 사지 뭐.' 이러신다. 농담이 어쩐지 다큐로 가는 것 같아서 일단 '같이 가는 멤버들에게 물어보고 알려드릴게요.' 하고선 대화를 마무리했다.


나의 제안 같지 않은 제안과 덜컥 제안에 응하신 과장님의 진심인 듯 진심 아닌 대답이 어쩐지 계속 내 마음에 목구멍의 생선가시 마냥 걸려있었다. 아마도 바람 좀 진하게 쐬고 싶은 김 과장님의 속마음이 내게 읽혀서 일 테고 그리고 우리 마녀 군단 언니들과는 김 과장님과 꽤 막역한 사이라서 나도 모르게(아니면 내 속마음의 바람처럼) 같이 교외에 차라도 마시러 가면 좋겠다고 내 마음대로 생각해버린 탓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언니들이 김 과장님과의 초대를 마다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버린 탓이었다.


일단 우리 멤버들은 캠핑을 다녀왔고, 캠핑장에서 나의 만행을 들은 언니들은 언제 차라도 다 같이 마시러 나가자고 했다. 왕언니와 김 과장님은 동갑이었고 꽤 친한 친구사이였음을 나도 알고 있었고 다른 언니들하고도 친분이 꽤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했나 보다. 여하튼 언니들은 흔쾌히 과장님을 다음 만찬에 초대하자고 했다.


친분이 있다는 말은 어쩐지 썩 어색하게 들리는 것 같긴 하다. 아니 그보다는 친분이 있다는 말은 서로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서로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고 해서 다 같이 교외에 경치 좋은 곳으로 차를 마시러 갈 사이는 아니므로 언니들과 김 과장님의 친분은 그저 나쁘지 않은 친분 정도가 아니라 하루쯤 시간을 내어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으로 바람을 쐬러 갈 만한 사이라고 해두는 게 맞겠다. 우리가 친분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과 나의 귀한 시간을 오롯이 공유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시간의 쓰임애 대해 더더욱 냉정해지곤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회사의 전사적인 휴일에 맞추어서(평일이지만 우리 회사만 쉬는 날이므로) 약속을 잡고 다 함께 서울 근교로 나들이를 갔다. 이것은 무슨 회사 엠티? 아니 회사에서 진행하는 야유회? 도 아니고 우습게도 출발은 회사다. 회사로 모여서 다들 타고 온 차는 회사 주차장에 두고 운전은 김 과장님이 하신다. '아니, 우리가 운전시키려고 부른 건 아닌데~~~.' 언니들 넉살에 출발부터 웃느라고 입이 아프다.


왕언니의 명령?으로 셋째 언니는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캠핑 감성 물씬 나는 식당을 예약했나 보다. 어디로 가는지 그저 나는 따라만 가는 입장이 되어 버려서 그날 얇은 코트 바람이었는데 아뿔싸 갑자기 날씨가 너무 추웠다. 서울 근교지만 산 밑이라 날도 추웠는데 밖에서 고기를 고워먹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왕언니는 감기가 한 달째 나가질 않고 있었는데 연신 콜록거렸다. 우리들이 추워진 날씨에 발을 구르며 적응하지 못해 하자 가게 사장님은 우리더러 예약했지만 다른 곳으로 가셔도 괜찮다고 하신다. 괜스레 미안해진 우리는 날 좋을 때 오면 여기 정말 끝내주겠다는 둥, 다음번에 오자는 둥 하나마나한 얘기들을 하면서 마당 넓은 그 가게를 나왔다. 김 과장님이 그냥 편한 식당 가서 편한 게~ 밥 먹으면 안 되겠냐고 해서 다들 그러자고 했다. 추운 데서 오들오들 떨면서 고기를 굽기엔 이젠 우리도 우리 나이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차를 타고 일단 출발했고 그 차 안에서 나는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나는 김 과장님 초대를 자초한 나름의 벌?로 꽤 괜찮은 식당을 찾아내고 싶었다. 다들 배가 고팠고 그렇다고 이렇게 모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 아무 데나 가서 먹을 순 없었다. 운 좋게 10분 이내 거리에 꽤 괜찮은 갈빗집을 찾아냈다. 그때 시각이 점심시간 전이어서 그런지 가게는 아직 한산했다. 자리를 잡고 돼지갈비가 나오고 그 식당의 주력 메뉴 중의 하나인 명태 회무침이 정말인지 너무 맛있었다. 고기를 시키면 반찬으로 나오는 메뉴 었는데 따로 시킬 수도 있었다. 고기도 맛있고 술도 맛있고. 우리 중에 술이 제일 센 왕언니는 감기 때문에 술은 거의 못했다. 김 과장님도 운전 때문에 술은 못했다. 둘째 하남 언니는 이날 김장을 해야 한다고 해서 나오질 못했다. 그날 정말로 우리들의 김 과장님은 밥도 사셨고 커피도 살 뻔했지만 커피는 과장님의 베프? 인 왕언니가 계산했다.


뻔하고 우리끼리라면 다 아는 회사 얘기들로 이렇게 오랜 시간 재미나게 얘기할 수 있을까. 경치 좋은 카페에 앉아 경치는 안 보고 서로 얼굴만 보면서 웃고 떠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끔 생각한다. 누군가 내게 여행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그건 여행지에 같이 가는 동행 즉, 서로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금요일이기도 했고 퇴근길과 맞물려 어찌나 막히던지. 차 안에서 다들 서울문산 고속도로는 이젠 다시는 타지 않겠다면서 중간에 내려달라면서 운전하시느라 힘든 과장님을 앞에 두고 우린 서로 아우성이었다. 그나마 한 운전하시는 과장님 덕에 무사히 너무 늦지 않게 회사로 다시 복귀. 한 것은 별로 없었는데 뭔가 험난한 하루 일정이었다. 애초 이 모임의 발단은 나였지만 나보다는 언니들과 더 막역한 사이라 그런지, 아니면 막힌 도로를 뚫고 나오는 운전으로 애쓰신 과장님 때문이셨는지, 아니면 운전만 하시고 술은 한잔 못하신 과장님이 걸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왕언니는 조만한 뒤풀이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하신다. 날짜도 못 박으신다. 다들 꼭 참석하라고! 왕언니 명령은 따르는 수밖에.



추신 : 갈비집에서 갈비는 J언니(우리들의 셋째언니)가 계산했었단다. 언니들은 운전을 마다하지 않으신 과장님께 점심을 지불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나보다. 역시. 상냥하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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