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약한 위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소화가 잘 안 되는 편에 속해요. 얼마 전에 두통이 심해서 한의원엘 들렀습니다. 일자목과 거북목의 중간쯤을 유지하고 있는 저는 가끔 목 근육의 경직으로 인해 두통이 사정이 없이 몰려오곤 하는데 이럴 땐 약도 소용이 없어요. 한의원에서 두통이 오면 언제든 오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어찌 되었든 한의원에 가서 두통이 왔으니 뒷목 언저리 어딘가에 침을 놓아 달라고 했더니 제 이마를 짚으시곤 앞 쪽 이마가 아픈 건 체한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딱히 체한 느낌은 없었는데 말이죠. 한의원에서 파는 환으로 된 소화제를 처방받았어요.
제가 위가 좋아지는 한약을 좀 먹어야겠다고 했더니 한의사께서 제게 이럽니다. '한꺼번에 급하게 먹지 않아요? 그럼 소식하면 되겠네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왜냐면 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거든요. 결국 머쓱한 마음만 안고 한의원을 나왔어요. 조금씩 자주 먹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그게 안되는지요.
저는 입맛이 없어서 배가 심하게 고파질 때까지 참고 있다가 결국은 갑작스러운 허기짐을 감지하고서는 급하게 음식을 먹곤 해요. 급하게 음식을 먹어본 사람들은 아실 거예요. 평소보다 빠르게 많이 먹게 된다는 것을요. 게다가 잘 씹지 않은 상태로요. 이런 날은 체헤서 괴롭고 대체 무얼 먹었는지 애써 심각하게 헤아려봅니다. 다이어트 중독자도 아닌데 말이죠. 그럴 땐 아파서 괴롭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행동하는 제 자신도 미워져서 괴롭답니다. 마치 술병으로 괴로울 때 내가 미쳤지. 또다시 과음하면 내가 사람도 아니다. 할 때처럼요. 제 여동생도 저랑 약간 비슷한 체질인데 '언니, 우린 자동 체중 조절기를 가진 셈이잖아.' 하는데 제겐 웃픈 현실이기만 합니다.
식사 후 20분은 지나야 우리는 포만감을 느낀다고 해요. 천천히 먹어야 먹는 양도 줄일 수 있다는 말이겠지만 조절이 안되더라고요. 급하게 먹은 음식들이 제 위에 도움이 될 리가 없겠죠. 급하게 많이 먹었다는 자책감과 함께 갑작스러운 복부 팽만감은 결국 먹은 음식을 그대로 게워내게 만듭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스스로 섭식장애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많지요. 왜 그럴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왜 같은 결정을 내릴까. 바보처럼 행동하는 제가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이 먹다니, 난 정말 바보 같아!"와 같은 자기 파괴적 생각은 앞으로 내릴 결정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 '감정 식사' 중에서
저도 체해서 결국 토하게 될 때는 심하게 자책을 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책 속에서 먹는 것으로 인한 자신을 자책하는 것은 좋지 않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자책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하면서 많은 경우에 자신에 대해 불평하고 자책하는 것 같아요.
수잔 앨버스가 쓴 '감정 식사'에 보면 저와 같은 사람은 감정 주도적 먹기(감정적 먹기, Emotional eating)를 한다고 할 수 있답니다. 먹는 것(음식 그 자체로도)과 감정이 꽤 깊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은 제게 너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먹는 것을 조절하는 것은 대게 우리 의지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우리는 기쁠 때도 어떤 음식이 떠오르기도 하고 화가 나거나 슬플 때도 음식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생각보다 감정과 음식은 꽤 서로 연관성이 높아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라면은 저에게 꽤 오랫동안 최애 음식이었어요. 아마 지금도 그럴 거예요. 아이를 뱃속에 넣고 저는 생각나는 음식이 라면뿐이었다면 믿으실까요. 아이의 건강이 걱정되어 아기를 낳고도 한동안은 라면을 먹지 못했는데요.(모유수유로 인해). 라면 공장이 다 사라지면 어쩌나 하고 남편에게 라면 좀 사두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약한 위가 점점 약해져서 그런 건지 라면이 점점 소화가 안되다 보니 예전만큼은 덜 먹게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갑자기 배고픔을 느끼거나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기면 갑자기 라면을 먹고 싶을 때가 많아요. 참아야지하고 생각은 하지만 저의 생각보다 먼저 제 손은 라면을 집어 들게 됩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저의 위는 급하게 먹은 라면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결국은 소화제 신세를 지거나 게워 낼 때도 있고 더구나 인스턴트 음식을 먹었다는 자책감에 기분이 더 나빠질 때도 있어요.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날 때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들이 저는 오히려 부러울 때가 있어요. 적어도 그들은 먹은 걸 소화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음식을 먹고 탈이 난 경험이 많은 저로서는 가끔 음식 앞에서 망설이는 경우가 있어요. 이걸 먹고 탈이나 나지 않을까. 소화가 될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도 해요.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은 제게 더욱 음식에 대해 오히려 더 강박관념이 생기게 만드는 것 같았어요. 스스로는 많이 먹지도 못하면서 매일 요리하고 싶은 음식을 찾아본다든가 아니면 흔히들 말하는 '먹방(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을 일부러 찾아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아까 제게 한방 소화제를 처방하신 한의사는 제게 그랬습니다. 자꾸 토하게 되면 위 기능을 약화시키므로 좋지 않으니 소화제를 먹고 소화시키는 편이 낫고 소식하라고요. 알지만 늘 제 마음처럼 안되니 그게 탈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