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딸에게 물려주고 싶은 미래는 1
보다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
가끔 작은 일에도 좌절하는 사춘기 딸아이를 보면 저는 늘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 집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완벽해지려고 애쓰지만 결코 완벽한 사람은 없단다.
엄마도 그렇고 너도 그럴 거야. 그래도 너는 너 자체로 소중하단다.
우리 모두가 그저 존재 자체로 소중해. 그 사실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건 진실이지.
하지만 이렇게 말해준다고 해서 아이의 상황이 나이지지는 않아요. 학원 가기가 너무 싫은 아이에게 말은 못 하지만 학원이라도 가서 열심히 공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 한편에 자리하고 있거든요. 엄마로서 나는 늘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한창 체력을 기르고 독서로 정신을 풍요롭게 할 나이에 매일 학원에 가라고 해야 하는 부모 역할이 참 싫더라고요. 남편에게 '우리 땐 이렇게 공부안 했는데 말이야'라고 했더니 남편이 대뜸 '그러니 네가 이 모양이지.'라는 대답이 돌아오네요. 남편의 농담이 진심인지 아니면 내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건지 잠시 망설여지더군요. '아니 내가 뭐 어때서?"라고 받아치려다가 괜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겨 순간 입을 다물었습니다.
요사이 부쩍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학원에 가야 하거나 힘들게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할 때면 대뜸 난 대학은 안 갈 거야. 대학은 안 갈 건데 왜 공부를 해야 해? 대학은 꼭 가야 하는 거야? 하고 물어올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와 실랑이가 힘든 저는 "대학은 꼭 안 가도 돼. 네 밥벌이만 할 수 있다면 대학이 무슨 소용이겠니. 다만 어른이 된다면 너 선택과 결과에 대해 책임은 져야 할 거야."라고 응수를 해줍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공부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하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학원은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예요. 말도 없이 학원 땡땡이를 칠 정도로 학원 가기가 싫은 아이에게 꼭 학원에 가야 하는 건 아니리고, 대학도 꼭 가야 하는 건 아니라고 '강력히' 말할 수 없는 저는 엄마로서 또 다른 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라인 수업이 이제 일상이 되고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인해 학원 수업도 가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이에게 공부의 필요성을 설명하는데 요즘 한계에 부딪히곤 합니다. 그래도 결국은 그리고 아직은 대한민국에서는 대학 졸업 여부에 따른 임금격차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등 직업 간의 격차나 직업에 대한 귀천 의식들이 있다는 등 우리 사회의 현주소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가 교육을 통해서 조금 더 나은 신분을 가지길 원하고 그 안전한 신분 안에서 많은 부를 얻어서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 내에서 무시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기에 요즘 젊은 세대의 부부들도 그렇게 아이들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지요.
노동시장에서 얼마나 높은 연봉을 받느냐, 소비시장에서 얼마만큼의 구매력을 갖느냐가 행복의 기준으로 절 대화되어간다. 교육열이라는 것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러한 일원적인 가치를 향한 경쟁에 다름 아니다. 아이에게서 청년에 이르기까지, 장차 '천賤한'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 잡힌다.
- 김찬호, <모멸감> 중에서
(아마 여러분도 아실만한) 독일인 방송인인 다니엘 린데만은 교육 관련 방송에서 독일에서는 대학에 가려면 면접만 본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방송에 참석한 다른 패널들이 인기학과에 경쟁자가 몰리면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다니엘 씨에 의하면 원하는 대학에 원하는 경쟁학과에 가려면 1-2년 정도 기다리면 된다고 대답합니다. 그 방송에서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한번 생각해보라고. 원하고 원해서 기다려서 의사가 된 사람과 그저 성적으로 의사가 된 사람들의 질적 수준에 대해 생각해보라고요. 의사들의 질적 수준을 떠나서 원하는 것을 늦게나마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는 독일 사회는 대체 어떤 곳인지, 정말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저에게는 믿을 수 없는 꿈처럼 다가왔습니다.
김누리 교수님은 그의 저서와 방송에서 말씀하시기를 독일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만 합격한다면 시험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대게 3년 정도 대기하면 의대를 갈 수 있다고 해요. 왜냐면 대학 입학에서 고등학교 성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20프로 정도라고 하네요. 그리고 대기 끝에 들어온 학생들이 졸업 후에 더 훌륭한 의사가 된 경우가 더 많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으로 그저 누구나 원하는 대학에, 원하는 과를, 원하는 시기에 갈 수 있다는 자격이 생긴다고 합니다. 정말 지구 한 구석에 이런 나라가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태어난다면 태어나는 순간 끝없이 경쟁해야 하고 그 과도한 경쟁이 우리 아이들을 불행하게 하고 있으니까요.
지금 우리 한국인은 경쟁을 마치 정의의 유일한 기준인 양 절대시 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정의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의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독일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최대한 많은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는 반면, 한국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하려고 합니다. (중략)
한국은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회이기도 하지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도 엄청난 차별과 격차가 존재하지요.
한국은 세계에서 자기 착취가 가장 심한 나라입니다. 자기 착취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자행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안되는구나.', '내가 게을러서 실패하는 거지.', '내가 공부 안 해서 이렇게 된 거야.' , '내가 더 노력해야 해.'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를 비난하고 착취합니다.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중에서
어쩐지 기형적인 사회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을 끊임없이 가스 라이팅 하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기회를 잃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경우는 저자가 제시한 예보다 훨씬 많겠지요.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에 대한 차별, 대학을 나온 사람과 안 나온 사람에 대한 차별, 좋은 차를 타는 사람과 아닌 사람에 대한 차별, 좋은 집에서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한 차별 등 수도 없이 많을 테고 우리는 그러한 차별을 느끼는 게 싫어서 더 치열하게 경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쟁하기 전에 무시하지 않고, 내세우며 우열을 가리고 비교하기 전에 스스로 만족하는 삶은 왜 그리 어려운 것일까요? 기회를 박탈하기 전에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사회, 원하는 것을 바로 이루기는 어렵더라도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보다 다양한 방향으로 기회가 제공되는 나라, 하여 그 수많은 삶의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는 나라는 정녕 어려운 일일까요?
우리 아이에게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너의 존재 자체임을 스스로 납득하게 되는 사회는 아직 멀었을까요? 경쟁에 시달려서 극단적 개인주의로 치닫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사회는 먼 얘기일까요? 지금보다는 더 상식적인 경쟁이 일어나는 시대는 아직일까요? 딸의 미래는 힘들더라도 딸의 딸이 학교에 다니는 시대에 오면 그때쯤은 가능할까요?
참고서적
-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2020, 해냄)
- 김찬호, <모멸감>(2016, 문학과 지성사)
- 김누리 강연, 세바시, 반교육의 나라에서 벗어나려면
- 김누리 강연, 차이 나는 클래스,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독일의 교육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