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 인생, 아부지
버티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아빠는 오랫동안 투병 중이십니다. 그런 분이 잊을만하면 꿈에 나오십니다. 꼼짝없이 누워계신지도 수년째,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빠 옆에서는 오늘도 여전히 엄마가 지키고 계십니다. 그런 분이 내 꿈속에서는 너무나 건강하신 모습으로 큰 딸인 저를 마구 혼내십니다.
제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 집 식당은 꽤나 많은 손님들로 늘 북적였습니다. 제 기억에 그 시절에 최고 많은 수의 직원을 두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시절 엄마는 늘 새벽까지 식당일을 하셨습니다. 자고 내일 하라고 해도 엄마의 일은 새벽에 오줌을 누러 나온 내가 말릴 때까지도 계속될 때가 많았었죠. 내일 식당에 찬으로 나갈 나물을 다듬거나 마저 다 못한 설거지가 있거나 아직 담그지 못한 김치가 있거나 혹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많은 일들을 꾸역꾸역 하고 있는 엄마의 등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마음에 안쓰럽다가도 '곰 같은 우리 엄마'하고 화가 날 때도 많았습니다. 어떻게든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알기엔 아직 어렸던가 봅니다.
그 시절, 곰처럼 일하셨던 엄마에게는 화가 났으면서도 어째서 우리 가족이 부족함 없이 사는지에 대한 의문은 가지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나름 귀하게 공주처럼 자랐다고 생각했고 늘 돈 부족한지는 모르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마도 고생하셨던 부모님 덕분이었을 거라는 걸 이제야 깊이 깨닫습니다.
아. 그러니까 꿈속에, 꿈속에서 엄마는 여전히 곰처럼 우직하게 일을 너무 많이 하십니다. 어린 시절 제 기억에 남아있는 늦은 밤의 엄마의 등과 똑같습니다. 저는 엄마에게 화를 냈어요. 누가 알아주냐고요. 그랬더니 아빠는 버릇없다고 저에게 불같이 화를 내십니다. 다른 꿈은 금방 잊어버려고 꼭 이렇게 부모님이 등장하는 꿈들은 며칠이고 몇 년이고 기억에 남아요. 어쩐지 화를 내고도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처럼,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것처럼, 오래전 헤어진 연인에 대한 미련처럼 말이에요.
프로이트는 인간이 무의식의 영향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로이트의 의자>라는 책에서 정신분석가 정도언 님은 꿈은 무의식에 접근하는 통로라고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무의식을 접하기는 어렵지만 꿈, 환상, 말실수에서 무의식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무의식은 금지된 욕망이며 내가 스스로 불편하게 생각했던 억압된 생각, 느낌, 충동, 기억들이 우글거리는 지하창고라고 합니다. 아마도 저의 무의식이 꿈을 통해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에는 드러난 꿈(manifest dream)과 숨어있는 꿈(latent dream)이 있다고 합니다. 드러난 꿈은 내가 기억한 꿈입니다. 그렇다면 숨어있는 꿈은 어떤 내용일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저는 아무래도 아빠가에게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수년째 곁을 지키게 하여 엄마의 수족을 묶어놓는 아빠가 미웠던 모양이에요. 그러지 말아야지. 본인이 원해서 아프신 건 아니잖아 하고 아무리 마음을 다독여봐도 병원이 아니라면 그 어떤 곳이든 더 행복할 두 분의 모습을 상상하면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늘 한결같이 아빠 옆을 지키는 엄마에게 아빠에게 갔을 화가 났고 꿈에서 그런 나를 아빠는(아마도 나의 초자아) 혼을 냈을지도 모릅니다. 저의 화는 그저 오랜 투병으로 괴로운 아빠 자신과 아빠를 지키는 우리 가족이 맞이한 현실에 대한 것일 테고 그건 제가 아무리 화를 낸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을 테니 저는 아무래도 이런 마음들을 제 무의식의 창고에 꼭 가두고 있었나 봅니다.
아빠에 대한 양가감정이 들어 괴로울 때 정재찬 남의 글을 만났어요. 복효근 님의 '목련 후기'란 시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만일 오랜 병상의 세월을 보내는 노인이 있다면 존중하라. 그 모습을 결코 추하다 하지 마라.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과 결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헤어짐은 헤어짐다워야 한다. 오랜 사랑의 무게는 시간의 절약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다. 안녕이라는 인사는 기능적이지만,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고 나서도, 적어도 동네 어구까지 나가서 떠나는 이의 꼭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드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참된 예의다. 그것이 작별이다.
이 대목에서 눈물을 멈출 재간이 없었어요. 아빠에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고 그만큼 더 힘드실 걸 생각하니 어쩐지 우리를 붙잡고 계신 것은 아빠 자신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술만 드시면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시던 아빠는 늘 가진 것이 없는 가장으로서의 자신이 초라해서 자식들에게 투정 아닌 한탄을 하셨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빠가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가난한 부모에게 도움이 되려고 19살에 베트남전도 자원해서 다녀오시고 가진 것 없이 결혼하고 열심히 일해서 번듯한 식당과 안채도 손수 지으시고 시골에 땅도 장만하셨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만하면 성공하신 삶이라고 나름 딸들에게 인정받고 계시는 아빠. 이만하면 당신은 꽤 괜찮은 삶을 살아오셨다고 생각해요.
아빠는 몇 년에 한 번씩 죽음의 문턱에서 힘든 고비를 맞이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가족은 늘 더 나아지길 바라는 기적을 원합니다. 오늘도 산다기보다는 버티고 계실 아빠의 하루, 사실은 그 힘든 버팀이 이미 기적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존버 인생이죠. 그러니 좀 더 그리고 조금 더 버티기로 해요. 우리 모두.
참고
- 정도언, <프로이트의 의자>, (2020, 지와인)
-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 2019, 휴머니스트 출판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