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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콩 Aug 02. 2019

안전화

안전화      

      

 남편이 승선한 배가 부두에 정박했다. 이번에 정박한 부두는 광양의 포스코 제철소. 두 달 만의 입항이지만 5일 정도 정박하고 다시 떠나야 한다. 싣고 온 석탄을 퍼내고 다시 떠나는 것이 상선의 숙명이다. 남편은 석탄을 싣고 다니는 상선의 일등 항해사이다. 짧은 정박 기간이나마 가족들은 항해사를 만나기 위해 배에 방문할 수 있다. 나도 남편을 만나기 위해 배에 방선(訪船)한 지 이틀째이다. 배에 왔다고는 하지만 남편의 업무시간에는 방 안에 혼자 있어야 한다. 이 시간을 주로 책을 읽거나 청소를 하며 보내고는 한다.      

 오늘도 청소를 하다가 젖은 안전화를 발견했다. 집어 들었더니 물먹은 솜처럼 물이 뚝뚝 떨어진다. 오전에 남편이 잠깐 들러 벗어 놓고 간 것이다. 안전화는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는 작업용 신발이다. 바닥에는 두꺼운 깔창이 깔려있고 앞쪽은 튼튼한 쇠가 덧대어져 있다. 색깔이나 모양도 특별히 화려하지 않은데다가, 일반적인 운동화에 비해 무거운 편이다.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자세히 본 안전화는 몹시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긁혀있었고 기름때와 석탄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안전화는 건설 현장에서나 신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선원에게도 중요한 것이었다. 배는 겉과 속이 모두 철판과 철골로 만들어져서 상처를 입기 쉬운 곳이다. 특히 갑판 위를 누비며 작업을 지시하고 감독하는 일을 하는 남편에게도 안전화는 꼭 필요한 신발이다.      

 안전화를 들어 방 안에 딸린 욕실로 갔다. 처음 빨아보는 안전화는 당혹스러웠다. 무거운 데다가 쉽게 구부러지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남편의 일은 덜어 줄 수 없으니 안전화라도 깨끗하게 빨아주고 싶었다. 세제를 묻혀 솔질하고 헹구어 빠는 것이 끝났다. 이제 말려야 한다. 그런데 이게 더 큰 문제였다. 낡은 수건들로 물기를 빼고 드라이기로 말리는데 두툼한 깔창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묻어 나왔다. 게다가 드라이기는 뜨겁게 달아올라 막 쪄낸 감자처럼 김을 내뿜었다.

 한참을 말리는데 문득 아까 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점심을 먹고 연안 동승 신청을 하러 가기 위해 에이전트의 차에 탔을 때였다. 우연히 서울 본사에서 온 직원과 동행하게 되어 잠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육상에서 일하지만 한때 배를 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배에 대해서도 일항사의 업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았다.      

“일항사님은 지금 많이 바쁘죠?”

“네, 안 그래도 아침에 일하러 가더니 흠뻑 젖어서 왔더라구요.”

“아, 탱크 들어갔다 왔나 보네요. 하수도 같은 곳이라 물이 있어서 젖을 수밖에 없어요.”

 문득 뜨거운 드라이기 바람에도 끄떡없는 젖은 안전화 위로 남편이 떠오른다. 캄캄한 동굴 같은 탱크 안에서 손전등 하나 들고 찰박찰박 걸어가는 뒷모습. 탱크를 점검한 날에는 가끔은 다쳐 오던 것도 생각났다. 그런 날은 유난히 피곤해하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왜 직접 해야 하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선박의 안전을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던 것도 이제야 기억난다.


 드라이기로 젖은 안전화의 물기와 함께 남편의 고단함까지 모두 말려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작은 드라이기 바람만으로는 안전화를 쉽게 말릴 수 없었다. 남편의 책임을 떠올리니 안전화가 더욱더 무겁게 느껴졌다. 가만히 보니 남편의 안전화는 아버지가 신고 다니셨던 안전화와 닮아 있다. 색깔과 모양도 완전히 달랐지만 목수였던 아버지도 먼지로 뒤덮인 안전화를 신었다. 아버지도 남편도, 안전화가 없었더라면 아마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다시 보니 무겁고 못생겼다고 생각했던 안전화가 듬직하게 보인다.       

드라이기로 미처 다  말리지 못한 안전화를 볕이 드는 창가에 올려놓았다. 항해사라면 그저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일하는 낭만적인 직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무거운 안전화를 신어야 할 정도로 험한 일도 하는 직업이라는 것이 새삼스럽다. 안전화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지금은 축축하지만 마른 햇볕에 하루 이틀 정도가 지나면 바싹 마를 것이다.  부디 이번 항해에서도 부상을 입지 않도록 남편을 지켜 주기를. 적도의 태양 아래에서 뜨겁게 달아오를 갑판의 철판으로부터 보호해주기를. 마음속으로 안전화에 부탁했다. 바다에서 고단하고 버거울 남편의 어깨도, 그리고 안전화도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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