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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콩 Jul 08. 2020

[항해사 아내의 일기] 남편이 돌아왔다.

- 8개월 간의 항해가 끝나고

[항해사 아내의 일기] 남편이 돌아왔다.      


 8개월간의 부정기 외항선 승선을 마치고 남편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남편을 만날 생각에 들떠 광주에서 광양까지 남편을 데리러 다녀왔다. 만삭의 임신부이지만 벌써 검역과 세관 수속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남편은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덥수룩한 머리와 함께 기름기가 쪽 빠져 다소 야윈 모습이었다. 주방장의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강제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더니 과연 몰라보게 살이 빠졌다. 나는 반대로 살이 찌고 배가 잔뜩 불렀으니 남편이 보기에 나도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을 것이다. 운전대를 남편에게 넘기고 나니 뭔가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남이 운전해 주는 차를 아주 오랜만에 타기 때문이다. 3기사님을 순천기차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해서 순천까지 와 점심을 먹었다. 항해사의 하선 직후 음식으로 국밥만한 것이 또 있을까.      


 3기사님과 헤어지고 시어머님이 계시는 화순 요양병원까지 바로 다녀왔다. 몇 달 전부터 항암 투병을 하시던 어머님은 아들을 보자마자 반갑게 껴안으셨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들에게 환자복과 밀어버린 머리를 보여주기 싫으셨는지 외출복을 입고 모자를 단정하게 쓰고 계셨다. 남편 없이 지난 몇 달간 혼자서 짊어졌던 책임과 부담감에 무거웠던 어깨가 이제는 좀 가벼워질까. 말씀은 없으셨지만 아버님 어머님도 아마 같은 생각이셨을 것 같다. 내일이면 또 항암치료를 하러 암센터에 들어가시는 시부모님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오자마자 지난 9개월간 장식품으로 쓰이던 TV가 제 기능을 찾았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나 홀로 집에’를 본 것이 마지막 제 쓰임이었다. 고양이가 TV 뒤를 지나다니다 선이 빠진 것을 혼자서 해결을 못해서 사람을 부를까 했지만 애초에 TV를 보는 취미가 없어서 그냥 둬버렸다. 남편이 손보기 시작한지 오 분 만에 TV가 켜진다. 랜선이 빠져 있었단다. 어쩐지. 케이블 선을 아무리 다시 꽂아도 안 켜지더라니. 집안에 오랜만에 TV소리가 들리니 그동안 혼자서 삭막하게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오고 TV도 켜지고 이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다!!      


 고생하고 온 남편에게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차려주면 좋겠지만, 원래 배에서 내린 첫 날에 무조건 외식이다. 하선한 첫날 저녁 메뉴는 치킨으로 선택!! 뱃사람들에게 마누라만큼 그리운 건 바깥음식 아닐까. 예능프로를 보며 교촌치킨의 맥주도 없이 신상 치킨을 먹었다. TV도 배달음식도 혼자서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인데 남편이 오면 놀라울 만큼 당연한 일상이 된다. 앞으로도 우리의 일상은 출산과 육아 혹은 다른 이유 때문에 계속해서 바뀔 것이다. 일상에 파묻히지 않고 잘 해나갈 수 있을까. 함께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혼자서 고생 많았던 나와, 배 타느라 고생 많았던 남편 우리 모두를 위해 내일은 더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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