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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콩 Sep 10. 2020

[ 육아에세이] 또 딸을 낳았다. 네 번째 딸이다.

- 엄마 저 마음에 안 들죠


"또 딸을 낳았다. 남편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
너무 실망스럽고 다시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 "


 내가 태어난 직후에 쓰인 엄마의 일기이다. 대학생 즈음 엄마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엄마의 일기장을 무심코 펼쳐보았다가 어리지도 않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아들 하나 얻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는데 딸만 내리 셋 낳자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는 기대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정말로 아들이겠지. 그런데 낳아보니 또 딸이라 엄마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막상 과거를 글로 대면하니 충격이 컸다.

 그때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던 때라 주말에 잠깐 집에 간 참이었는데 정리하다말고 학교에 돌아간다고 집을 나와버렸다. 영문을 모르는 엄마는 멀리 가는 딸이 밥도 안 먹고 나간다고 속상해하셨다. 진부한 자기소개서처럼 엄한 아버지에 자상한 어머니인 우리 부모님은 자식 다섯을 키운다고 워낙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것 또한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일기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렸다.


 아기를 낳고 아등바등 키우다 보니 문득 엄마의 일기장이 생각난다. 내가 어릴 때는 잘 웃고 순한아기여서  옆집 할머니나 부모님의 식당에 온 손님들이 많이 봐줬다고 들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나는 바쁜부모님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혼자서 자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아이를 낳고 보니 아기란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무리 순한 아기였어도 시간마다 젖을 물어야 했을 것이고, 기저귀를 갈고 빨아야 했을 것이고, 씻기고 재우는 것도 일이었을 것이다.


 밤늦도록 우는 아기를 안고 거실에 앉아있는데 엄마의 일기장이 떠올랐다. 내가 본 페이지가 일기의 첫 페이지였는데 그 뒷 내용이 궁금해졌다. 태어난 아기가 마땅치도 않은데 이렇게 육아가 힘들면 엄마는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엄마는 그 당시 어떤 마음으로 나를 키우셨을까 궁금해졌다.

 나 역시 아기를 낳고 못생겼다고 펑펑 울었지만 지금은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출산과 육아는 이렇게 복잡다단한데 너무 첫 페이지만 보고 덮어버렸구나 싶다. 다음에 엄마의 집에 가면 어딘가 먼지투성이로 처박혀 있을 빛바랜 일기장을 찾아서 엄마 몰래 좀 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엄마를 차에 태우고 일을 볼 일이 있었다. 병원에서 아버지 간병을 하는 중 나오신 김에 손주도 보고싶어하셔서 집에 모시고 왔다. 엄마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엄마 나 태어났을 때는 어땠어요? 또 딸 낳았다고 나는 막 젖도 안 주고 구박한 거 아니야?"

 아들이 아니라고 차가운 윗목으로 아기를 밀쳐버렸다는 남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직후였다. 그런데 엄마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들이 아니라서 실망은 했는데, 갓 태어난 네가 너무 예뻐서 그럴 수가 없었다. 피부도 뽀얗고 눈도 땡글 해서 아빠도 너를 엄청 예뻐해서 가는 데마다 데리고 다녔단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사는 곳 근처로 이사 왔다. 그렇게도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하던 아빠는 간이식 수술의 부작용으로 뇌질환이 와 8년째 와상환자로 병원에 누워계신다. 엄마도 8년째 병원에서 간병 생활을 하고 계시는 중이다. 걱정만 끼치던 망나니같은 막내딸도 다 커서 이제는 부모님을 보살피는 입장이 되었다. 가까이 사는 딸이 자주 병원을 들여다보니 종종 다른 환자나 보호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그럴 때 엄마는 우주에서 가장 어깨가 높은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거린다.

 엄마 일기장의 뒷페이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언젠가 내 아이도 엄마의 일기를 보는 날이 올 것이다. 내 일기장 역시 어떤 날은 애 키우느라 힘들어 죽겠다고 끄적거리다가도, 대부분의 나날은 기쁨으로 가득 담겨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의 무한한 책임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기가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아기가 깨기 전에 글을 마무리해본다.


태어날 때는 '엄마, 저 마음에 안 들죠?'

하지만 지금은

'엄마 저 마음에 완전 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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