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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콩 Feb 10. 2021

[독서리뷰] 파친코 구슬_엘리자 수아 뒤사팽’

- 경계선 위에 사람들, 하지만,  "오케이 고고"

 


오가와 부인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부터 나는 손에 든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일본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책상과 침대가 있는 수영장방이 있는 오가와 부인과 미에코가 사는 집은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첫인상과 달리 전반적으로 내용은 담담한 일상이었다. 담담한 일상이 오히려 주인공의 혼란스러움과 고독을 잘 드러내는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간결하고 세련된 문장은 덤.      


 소설의 배경은 일본 도쿄이다. 나 역시 일본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누비고 다니는 신오오쿠보와 니포리 등은 나도 여러 번 다녔던 거리였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일본에 갔는데 전혀 일본어를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체류비를 벌기위해서 일을 해야만 했고, 꿈에 그렸던 외국 생활은 결코 녹록하지는 않았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이곳이 한국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를 하고 혼이 나거나, 외국에서 느끼는 서러움 같은 것들. 당연히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하루에라도 몇 번씩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익숙한 그 곳이 그리웠다. 힘든 순간마다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내 집, 내 가족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런데 클레르의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돌아갈 곳이 없는 느낌은 어떨까. 


  일본에 있을 때 딱 한번 파친코에 방문한 적이 있다.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잠깐 따기도 했지만 그 약간의 돈 마저 잃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다. 아마 그 때문에 선뜻 파친코구슬이라는 제목에 끌렸을 것이다.  


 그때는 파친코라는 것이 일본 내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도, 큰 의미를 두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파친코가 재일조선인의 중심산업인지도 몰랐다. 그저 담배피우며 도박이나 하는 곳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일할 때 성실하고 일을 잘하는 아르바이트의서 만난 매니저의 취미가 파친코라는 것을 알고 문화충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샤이니의 파친코 구슬은 할아버지의 정체성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묵직하고 시끄럽게 끊임없이 굴러다니며 쉬지 못하는 파친코 구슬 말이다. 구슬 안에는 일본어를 말하지 않기 위해서 혀를 잘라버렸다는 할머니의 할머니도 있을 것이고,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도 있다. 혼란은 불완전으로 다가온다. 클레르는 병아리가 되어 버린 것 같고 나약하며 무기력하다.      


-엄마아빠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나는 그들의 작은 병아리이다. 그들은 이 병아리를 품에 꼭 끼고 산다.

-병아리가 된 나를 떠올린다.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부딪히고 넘어지는 병아리. 혀 끝에 맴도는 삐악삐악을 삼킨다.     


 경계에 선 사람들 정체성의 상실과 부재는 주인공을 부모의 병아리로 만든다. 품속에 품어서 보호해야 하는 존재인 병아리는 불완전한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나는 소통의 부재가 가져오는 정체성의 혼란에 주목하고 싶다. 언어가 가지는 문화적 정체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클레르의 할머니에게 있어서 손녀가 한국말을 못하는 것이 못내 서운하다.한국어를 다 잊어버리면 미라로 남을 거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클레르는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의 언어(일본어)가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에게 클레르는 아이구 이쁜 새끼이다. 아이구라는 단어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책의 본문에 프랑스어로 알파벳으로 표현한 아이구라는 단어가 몹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Aigou, yeppun sekhi(아이구, 예쁜 새끼)......불쌍한 것, 어여쁜 것......”


'아이구'는 자애로우면서도 이타적인 감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안타까움, 실망, 그리고 고통 등 여러 단어를 표현해 낼 수 있다. '새끼'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 만이 느낄 수 있는 단어의 여러가지 감정은 클레르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새끼는 동물에게나 붙이는 단어라는 것이다.


 '파친코 구슬'은 실존적 의미를 찾아나가는 성장 소설이다. 주인공 클레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러면서도 자신이 물위에 뜬 기름만큼이나 이질적이라고 느끼는 여름을 보낸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클레르는 샌드위치 우먼의 마이크를 뺏어서 우리를 좀 쳐다보라고 소리치고 싶다. 유리병 안에 갇혀서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을 혼자서 바라보는 고독한 클레르의 답답한 마음이 샌드위치 우먼에게 투영되어있었다.

   

-나도 그제야 손을 든다. 소리칠 수 없어서 손을 아주 높이 든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배 위로 올라간다. 확성기는 이제 조용하다. 하나의 메아리만 울려 펴진다. 뒤섞이는 언어들의 메아리만. 

“오케이, 오케이, 고,고!”     


 조국을 염원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결국 한국으로 떠나는 손녀와 함께 배에 오르지 않는다. 대신 기꺼이 손을 흔들며 배웅하며 손녀의 떠남을 응원한다. 구 세대의 체념이 다음 세대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시지프스가 굴리는 거대한 바위처럼 끊임없이 굴러 올렸다가 굴러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고단한 삶이지만, 굴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내는 데에 실존적 의의가 있다. 할머니의 오케이는 소설 전반을 뒤 덮고 있는 미묘한 어긋남과 상실감을 모두 덮는다. 물론 한국에 도착해서 클레르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집을 이고 가는 달팽이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궁금하지가 않다.
어디를 가든 그곳이 머무르고 잠을 자는 곳이다.


클레르의 기나긴 고독이 끝나기를 빌어본다. 그리고 병아리의 노란 빛 솜털을 벗어던지고 언젠가 멋지게 날개를 펼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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