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무봉 옛글

인생 서고

조성범

by 조성범

인생 서고

1.
책 님아 수천 년 뜬눈으로 잠들어 있었는가?
어둠 속 손길 찾아 억 겹 풀어헤치려
그리도 곤히 잠 못 이루고 있었는가?
이제나저제나 수백의 세월이 쌓이고 쌓여
침침한 시간여행, 끝도 없이 좌정했구나

2.
젊은이 가슴속 파고들려 애태웠어
책꽂이에 기대 늙은 먼지 뒤집어쓰고
수만 년 세월을 타고 넘느라
굽은 책 허리, 목심에 기대 살았구나

3.
젊은 책에 쫓겨난 뒷방 신세라
천수 만수 백발이 성성하게 휘날리며
상큼한 옷매무시 새책에 밀려나
서고 안 책 무덤 미라가 되었구나

4.
전쟁통에 책 표지 얼얼하게 두드려 맞고
한겨울 땔감으로 화장당하다 살아남아
서생 손길 잡고 죽다 기적처럼 건져져
이제야 빛을 보나 했건만 쾌쾌한 서고 속이라

5.
책 만든 지은이 애지중지 눈물겨웠네
통곡의 세월 앞에 한갓 종이짝 신세라
검은 먹 멱감고 찍어낸 생명인데
역사의 돌팔매로 갈기갈기 찢기였네

6.
목판 글자 목수의 칼날을 먹고 태어나서
온몸 피로 단련되어 한 자 한 자 외롭게
등짝 깎인 종이 위 새 생명 꿈틀거리며
아장아장 어린 날 견디다 보니 억 겹이 구료

7.
겨울밤 책장에 누워 유유자적하다 보니
손길 타고 누군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
가슴팍 집을 짓고 실을 타다 보면
인간의 영혼이 되어 환생할 날 있겠네


2016.12.31.
조성범


*도서관 품팔이 시절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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