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무봉 옛글

건축의 낙원을 찾아

조성범

by 조성범

건축의 낙원을 찾아


1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命을 받았기에 사람임을 즐거워하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음은 사람의 노릇을 사람답게 가꾸며 ‘멋’ 있게 살아가라는 하늘의 계시이자 아버지 어머니의 命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건축, 인간의 건축, 건축의 사가들은 아니 선배 건축가들은 건축을 인간이라 서슴없이 말하기를 주저치 않는다. 그리고 건축인 인간에 대한 계통적인 교육-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문화적-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이어받을 것이다.


건축의 이해 속에서 표출되는 행위를 시각화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 안에서 사람의 복잡한 세계를 헤아리는 깊이가 다양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인간에 대한 물음이 어제오늘의 문제인가. 유사 이래 계속되고 있는 의문과 미해결의 덩어리 아닌가.


사람에 대한 의문은 수많은 철학가들의 평생을 건, 아니 몇 천 년의 영겁을 걸어서도 무엇이라 명쾌하게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건축을 이해하기 위한 사람의 이해는 영영 불가능한 것인가. 소신으로는 인간의 이해를 처음부터 완결 짓겠다는 섣부른 조바심을 자제하고 사람의 기본적인 행위, 정신의 끈, 어디에서든지 자연스럽게 보이는 인간을 좀 더 예의 주시하는 관찰력으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일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따뜻한 눈길로, 포근한 가슴으로 볼 수 있는 마음가짐에서부터 사람에 대한 건축적인 이해를,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제각기 맡은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와 저녁밥을 먹고 잔다. 사람의 하루 일과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러한 몸짓으로 습관화되고 당연시되었기에 깜짝깜짝 놀랄 경탄을 하지 못하나 보다.


지금까지 살아져 왔던 생활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깨어있는 생활인이 되자. 건축적인 사고, 꿈에서도 건축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들면서도 건축적인 밥을 먹을 수 있는.


“밥상은 대지가 되고 밥그릇은 주택, 고층 APT가, 뚝배기는 작은 연못, 호수가 되어 파라미가 뛰놀고 붕어가 개헤엄을 치고 언덕배기 밑엔 강태공이 낚싯대를 들이고 있는, 수저는 주택가의 오솔길이 되어 산책을 즐기고 있다. 간장 그릇은 돈 많은 청상과부가 사는 산등성이의 별장 수영장이 되기도 한다. 저녁노을이 들면 동구 밖 장승 앞에서 철희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민영이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삶의 멋을, 감동을 건축인의 생활에 배일 수 있는 것이다.”


거리를 거닐면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윗도리는 빨간색 아랫도리는 노란색으로 물들인 말괄량이를, 의미가 이상한 말을 가슴에다 등에다 팔에다 마구 붙들어 매고 다니는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된다.


빨주노초파남보의 색동 물결을 보면서 건축적 정염이 일어나기도 하고 현란한 것 같으면서 차가운, 무거운 인상을 주는 듯하면서도 요염한 여염집 셋째 딸을 거리에서 만난다. 이들의 움직임을 정겹게 살펴보노라면 건축적 사고에서 오는 행위의 우스꽝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은 고고장으로,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은 백화점으로,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은 커피숍으로 달아나는 사람들의 물결을 보면서 건축적인 자아를 되돌아본다. 동일한 시간대에서 보이는 그들이 나라면 나의 여러 행위를 한 번에 뒤엉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토록 재미있고 우습고 때로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겁이 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구미를 어떻게 건축의 그릇에 담을 것인가. 매우면 맵다고 싱거우면 싱겁다고 당연한 것을 가지고 투덜대는 건축의 이웃을 어떻게 건축적 사고로 갈무리할 것인가.


아니 건축가에겐 이토록 제 멋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규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일까? 건축가의 눈이 노란색이면 노란색을, 자주색이면 자주색을 입혀도 되는 건가. 제 취향에 따라 하는 행위가 붐비는 거리에서 만난 옷의 색깔과 무엇이 다른가.


어렵다. 복잡 이상이다. 미로를 걷는 듯하다. 복잡한 것보다 몇 가지 더 뒤엉켜 있는 무리가 있다.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천방지축의 심연. 그렇다고 포기도 불가능한 하여야만 하는 다변성, 다양성, 완결하기 어려운 과정 성, 솟아올랐다 가라앉는 歷史의 윤회 같은 것이 건축일까.


건축적 사고로 하루의 일과를 대하면 건축인은 사색가가, 행동심리학자가 되며 어느 땐 가는 일선에서 뛰는 건축적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건축적 사고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키워준다. 소리의 일차적 인지를 삼차적 영혼으로 화음을 일으키는 지휘자처럼 되기 위해 건축적 사고는 쉼 없는 숙제를 달게 받는다. 건축적 요소의 다양성, 가변성, 잠재태들을 획일화가 아닌 명쾌함으로 발견하고 키워간다.


건축의 本質은 건축 이전에 건축인 인간에 있을 수 있는 명증성이 있다. 건축을 위해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지고 질이 있는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정열로 살아가자.


건축을 어떡해라는 물음을, 건축은 인간 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깨달아 포근한 눈길이 머무르는 사람의 그릇이 될 수 있다면, 그 그릇이 뚝배기의 된장국처럼 바글바글 이글거리는 정열과 믿음이 자존으로 지켜지고 감사할 수 있다면 건축의 이해는 이미 몇 발자국 찍을 것이리라. 더불어서 의식적 무의식적 안정을 주는 자연의 순리를 깨칠 수 있으면 건축적 사고의 흐뭇함은 즐거움이 더할 것이다.


우스워할 수 있는 건축, 재미있는 건축, 폭압이 아닌 너그러운 위엄이 있는 건축, 남녀노소의 시간성이 한 자리에서 손을 맞잡고 어울덩더울덩 어우러질 수 있는 건축, 새침데기의 소녀처럼 앙증스러움이 있는 건축, 열아홉 처녀의 순박처럼 가지런하게 얼굴을 붉힐 수 있는 건축, 노래가 있고 시가 있고 소설이 있고 그림이 있는 건축.

시원한 물보라를 뿌리는 폭포수처럼 사람의 가슴을 씻겨주는 명랑한 건축을, 때로는 웃고 떠들고 때로는 심각할 수 있고, 때로는 못 되 먹은 사람의 행위를 무지막지 욕하기보다 너그럽게 감싸주는, 그릇이 넓은 건축을 그리면서 건축을 생각한다.


2


건축은 어렵다. 건축은 어려운 만큼 해 볼 만한 소중한 가치가 있다. 건축은 어렵게 배우면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이 있다. 그러나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하여 아무나 대들 수 있는 그런 고향은 아니다.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인 이중성도 또한 있다. 재능이 겸비되어 있지 않으면 힘든 노력으로도 일굴 수 없는 한계는 빨리 올 수도 있다.


예술이라 이름 하는 분야가 그러하듯이 건축도 땀에 더불어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예술이 내린 재능의 축복이 있어야만 하리라. 영혼의 물결 같은 것, 작품과 이야기하는 내밀한 오고 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더 어려운 것일 게다.

많은 시간을 건축을 향한 기원으로 제단에 바쳐서도 도달하기 어렵다면 그때는 겸손해야 할까. 산 사람들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사람을 허용한다고들 한다. 인간의 산심과 순수한 열정, 투지에 감화되어 정상을 인간의 발을 허락하리라

인간의 잠재된 보고는 무한하기에 성스런 믿음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건축이 인간에게 감동하고 인간도 건축을 감동시킬 수 있지 않을까. 정성스러운 신심으로 간구하고 애씀을 지속하면 인간도 건축도 모두 향기의 무게를 알아차리리라.

교수님은 자주 말씀하신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건축의 일을 하면서 재미를 붙여야 한다고, 이러한 건축을 향한 정열이 발화되는 날 건축의 품 안에서 뛰놀고 웃고 우는 생사희비를 만끽할 수 있다는 믿음은 건축에 대한 무리일까.

“나는 건축에 미친 사람이야요. 미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감동시키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일전에 타계하신 김중업 선생이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건축을 잘하기 위해서는 건축이 미치도록 좋아할 수 있는 건축적 기쁨을 느끼는 일부터 시작하자.


흰 종이와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바위,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첨탑처럼 솟아오른 대학 건물, 벤치에 앉아 담배 한 모금을 들이켜면서 파란 하늘을 유유하는 까치의 날갯짓을 그리자. 건축적 힘을 키우는 밤샘을 즐거워하자.


밤을 지새우면서 디자인 테이블과 대좌하며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싸우자, 오른쪽 볼, 왼쪽 볼, 등허리, 허리춤, 종아리...... 사정없이 건축에게 터지더라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싸우자. 그리고 어느 정도의 느낌을 알아차리게 되면 건축은 인간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대화로써 합일점을 찾아가는 것이란 것을 깨닫자. 건축가는 여타의 예술이 그러하듯이 역사의 선도자, 시대의 선구자적 존재임을 소명으로 지켜 나가자.


건축은 아가의 눈빛처럼 해맑은 옹달샘이고

자연에 생명의 기운을 주는 대지의 흙 같은 것이라면 건축가의 프라이드에 흠집을 내는 것은 아닐는지


건축의 고향에서 헤엄도 치고 저녁에는 테니스를 즐기고 음악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한 눈 팔지 말고 건축 어휘를 배우고 또 배우자, 그리고 미지의 창공으로 건축 낙원을 찾아 여행을 떠나자


1988년 5월

조성범


*이 글은 대학시절 충북대 건축공학과 학회지 제2집(1988년)에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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