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식 조직운영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2016-07-23(토) 김용민 브리핑에 나간 [최동석 칼럼]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9938
[0723토②] ''우병우 특종' 김프로이드, "청와대 최측근 위태롭다"
안녕하십니까? 최동석입니다.
1.
지난 시간에는, 유럽의 사민주의 정신과 협동조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에서는 왜 협동조합이 발달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협동조합식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
2.
우리에게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협력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두레, 계, 품앗이 등과 같은 상부상조하는 숭고한 정신과 그것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관행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 강원도에도, 그러니까 1960년대만 하더라도 두레의 관행이 성행했습니다. 모내기, 김매기, 타작 같은 힘든 농사일은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함께 했습니다. 시골에는 계도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공제조합의 옛날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유럽에서 확산된 사민주의 사상과 협동조합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농촌에서 지각 있는 어른들 중에는 지주와 소작농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일본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저지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재산을 빼앗기고 고문당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일제 총독부는 시골에서 농민들이 자율적으로 모여서 뭔가 도모하는 것을 극렬히 저지했습니다. 독립운동과 연계되어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4.
해방 후, 다시 두레의 정신으로 협동조합 운동을 벌이려고 했지만, 그런 운동이 오히려 정부에 의해 제지되었습니다. 독재자들은 협동조합을 법률로 정부의 통제 하에 두었습니다. 농협과 같은 조직은 정부의 관변단체가 되었습니다. 농민들이 자생적으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자치조직으로 운영해야 할 협동조합의 정신을 무시하고, 정부가 농민들의 행동을 일일이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5.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재무관료 출신들이 농협중앙회 회장을 맡기도 했으니까요. 조합원들을 위한 협동조합이 아니라 관료들이 조합원을 이용해 먹는 조직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이렇게 관료화된 조직에는 항상 부정부패가 온존 합니다.
6.
자생적인 협동조합 운동은 이렇게 국가의 제도적 장치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정부가 자조, 자립, 자치의 협동조합 정신마저 완전히 말살시켜버렸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1970년대 초부터 관주도로 시행했던 새마을 운동이었습니다.
7.
새마을 운동은 농민들에 대한 선전선동 운동이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세계적으로 농촌 개발의 모델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했던 가장 획기적인 정책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협동조합 운동의 기본정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8.
박정희 정부는 1971년 41억 원을 새마을 운동에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8년 후 1979년에는 100배가 늘어난 4,200억 원의 정부예산을 새마을 운동에 쏟아부었습니다. 이것은 협동조합 정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정부사업이었습니다. 독재자들은 시민들이 자생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틀어막았습니다. 아직도 새마을 운동을 선전하기 위해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8.1.
만약에, 새마을 운동이 농촌개발모델로서 그렇게 성공적이었다면, 오늘날 농촌이 왜 저렇게 가난의 대명사가 되었을까요? 왜 젊은이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가서 콘크리트로 지은 아파트 생활을 할까요? 유럽인들처럼 전원생활이 더 멋지지 않을까요?
협동조합이 발달한 나라의 사례
9.
협동조합 운동을 활발히 벌였던 유럽의 복지국가들 중에서 독일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쾰른에서 남동쪽으로 약 1시간 거리에 바이어부쉬(Weyerbusch))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이 마을에 프리드리히 라이파이젠(Friedrich Raiffeisen, 1818~1888)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라서 군인정신을 중히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라이파이젠은 군인정신은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영혼이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주변으로부터 들었습니다.
10.
당시에는, 가난한 농민들이 고리채 때문에 자본가들에게 경제적으로 수탈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라이파이젠은 장기저리 신용대부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본가들이 농민들에게서 착취하던 악순환 고리를 끊어주었습니다. 이때가 1847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프리드리히 라이파이젠을 신용협동조합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영국의 로치데일 협동조합보다 3년이 늦은 셈이지요.
11.
그 후,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 신용협동조합을 라이파이젠방크(Raiffeisenbank)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도회지에서도 소시민들이 스스로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폴크스방크(Volksbank)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도회지에서의 폴크스방크와 농촌에서의 라이파이젠방크가 19세기 중엽부터 자생적으로 독일어권에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2.
오늘날,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을 여행하다 보면 마을마다 조그마한 은행 점포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폴크스방크 또는 라이파이젠방크라는 간판이 보이면 그런 은행들은 모두 협동조합은행입니다. 네덜란드에서는 라보방크(Rabobank)라고 하는데, 이것도 라이파이젠방크입니다. 이런 협동조합은행의 조합원들이 독일에만 현재 약 2,000만 명가량 됩니다. 은행점포만 해도 대략 2만 4천여 점포가 독일 전역에 깔려 있습니다.
이 은행들의 2015년 말 현재 자산규모 합계는 원화로 따지면 약 1,100조 원이라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이런 규모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4대 은행, 즉 우리은행, 하나은행, 국민은행, 신한은행을 합친 것과 비슷하거나 조금 적은 규모입니다.
이것은 전국적인 협동조합은행만 계산해서 그런 것이지, 그 밖에도 지역별로 또는 산업별로 특화된 협동조합은행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건축협동조합은행, 여행협동조합은행 등과 같은 협동조합이 발달해 있습니다.
이런 은행들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지 정부 관료가 이래라저래라 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정부 관료가 나타나서 통제하는 것은 협동조합이 아닙니다. 협동조합은 이렇게 자율적으로 자치적으로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독립적으로 성장해왔습니다.
13.
그 밖에도 다양한 협동조합이 시민생활의 상당 부분을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모두 합치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협동조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민주적인 공동체의 생활양식이 완전히 뿌리를 내렸습니다.
14.
자본가들의 착취와 관료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협동조합을 통해 많은 시민들이 끈끈하게 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들도 협동조합의 정신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4.1.
그러니까 주식회사가 주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미국식 경제개념은, 자본가들의 약탈적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속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조직을 만들어서, 다양하게 이윤을 창출했다면 그 혜택도 다 함께 누리는 것이 합리적이고 정당한 일입니다.
협동조합식 조직운영 사례
15.
그러면 국가를 협동조합식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게르만 모델의 하나인 스위스연방공화국은 대통령의 임기가 1년입니다. 매년 1월 1일 취임해서 12월 31일 퇴임합니다. 일곱 명의 연방장관 중에서 먼저 장관에 취임한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대통령의 직무를 1년씩 수행합니다. 물론 이런 관행에 따라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통령 직무를 부가적으로 맡은 장관은 연방정부의 공식적 의사결정을 토론과 합의를 통해 이끌어내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때의 합의는 항상 만장일치여야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 직무를 부가적으로 맡고 있는 장관은 모든 것이 다른 장관과 동일하지만 그저 맨 앞에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라틴어로 primus inter pares(프리무스 인터 파레스, the first among equals)라고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특권을 부여하지 않아 모든 것이 다 똑같지만 맨 앞에 나섰다는 뜻입니다.
16.
장관의 임기는 4년이며 연임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일곱 명의 장관은, 연방의회 의석수에 비례하여 좌파, 우파, 중도파 등 네 개의 다른 정당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업무영역은 서로 다르지만 장관들에게는 모두 동일한 권한과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정당이 다르기 때문에 합의에 이르는 것이 쉽지 않고, 그래서 합의가 될 때까지 대화하고 토론합니다. 이들은 바로 헤겔이 정립한 역사발전의 변증법적 원리에 따라 토론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가르쳤던 바로 그 대화법입니다. 영어로는 dialectic이라는 정반합의 대화법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학교에서 이런 대화법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러니 정치인들도 토론은커녕 대화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일단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가 확정되면 정부와 정치권은 거의 한 목소리를 냅니다.
17.
스위스 연방정부의 이런 전통은, 일곱 명의 정무관들이 서로 수평구조를 유지하면서 국가를 운영했던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신과 유사합니다.
프리무스 인터 파레스(primus inter pares), 즉 모든 것은 동일하지만 맨 앞에 서있다는 말도 그때 나왔습니다. 이 라틴어 표현은 고대 로마 공화정 당시 시민들이 직접 정무관 7명(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조영관, 재무관, 호민관, 독재관 등)을 선출하여 국가운영을 맡겼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은 평등한 구조에서 자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되 합의를 강조하는 스위스 사람들의 정신을 나타낸 것이죠.
각 장관들도 자신이 맡고 있는 연방 부서의 맨 앞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독일어 포어슈테어(Vorsteher)라고 부릅니다. 독일어권에서 조직의 장을 맨 앞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포어슈테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관은, 연방 부서 공무원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맨 앞에서 토론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토론을 할 줄 모르면 공적 직무를 맡을 수 없습니다.
18.
이런 전통은 스위스 연방헌법이 만들어진 184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금년(2016년)도 일곱 명의 연방장관들 면면을 보면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들입니다. 피아니스트도 있고, 포도재배 전문가도 있습니다. 스위스 역사에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지도자는커녕 스위스를 오늘날처럼 잘 사는 나라로 이끈 위대한 정치지도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저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했던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소시민들이 장관을 맡았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합리적으로 의사 결정하기를 168년간 지속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이 지구 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 안전한 나라,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인구 대비 과학분야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창조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19.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를 찾는 잘못된 성향이 이승만과 박정희 같은 독재자들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선전선동으로 자신이 위대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시민들에게 심어놓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지도자가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환상을 믿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직장인들의 신화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독재자를 위대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로 왜곡하는 바람에 그의 딸을 또 뽑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은 것이죠. 우리에게는 위대한 인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이고 지극히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시민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선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그런 사람이 선출될 수 있는 시스템도 어서 만들어야 합니다.
20.
소위 일류대학을 나와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나 출세한 사람을 우리가 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처럼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아마도 많은 부조리와 불의한 일을 직접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면 최소한 불의한 일을 눈감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출세할 수 없으니까요.
21.
스위스 연방정부의 국가운영모델이 바로 협동조합의 운영방식입니다. 이렇게 협동조합식으로 국가를 백수십 년 간 지속적으로 운영해왔더니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제가 협동조합 운동에 희망을 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덟 편의 [최동석 칼럼]을 들어주신 청취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음 주부터 여름휴가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8월 하순에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