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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Mar 18. 2019

네 개의 기둥이 무너진 나라에서

내가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

[2019-03-18_페북에 쓴 안내글]

참으로 답답할 때가 많다. 그래서 강좌를 준비했다.

나는 특히 이땅의 지식인 부류에 속한 사람들과 얘기할 때마다 답답하고 한심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미국물을 많이 먹은 사람들이다. 얼마나 미국물을 많이 먹었느냐에 따라 다른데, 많이 먹을수록 숨이 더 막힌다. 미국물을 먹더라도 비판의 필터로 걸러진 물을 먹은 사람들과는 그래도 어느 정도 말이 통한다.

내가 숨 막힌다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을 단순한 자원(resource)이나 효용(utility)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다른 관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다. 이들은 정말이지 꽉 막혔다. 

미국의 구정물만 먹고 온 사람들은, 인간은 피라미드형 계급구조에서 톱다운으로 지시하고 명령하여 똑바로 일했는지를 늘 통제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당근과 채찍으로 동기부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조직을 수평적 네트워크 구조와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을 꿈도 꾸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숨이 턱 막힌다. 인간을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진실을 설명하려면 인간관의 변천사부터 가르쳐야 하는데, 이것은 난망한 일이다. 얼치기로 배웠다는 사람일수록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도 현직 교사들과 얘기하면 조금 낫다. 조금은 열린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사를 단순히 가르치는 노동자로 취급하는 오늘날의 암담한 교육현실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꽉 막힌 지식인들보다 훨씬 더 유연하게 사고할 줄 안다. 학교에서 교사들은 늘 억눌려 있다.

그래서 나의 페친 윤진 선생의 맹렬한 도전정신에 감복하여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라는 강좌를 링크한 것과 같은 취지로 마련했다. 

아무쪼록 페친 여러분이 많이 전파하여 교사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들, 나아가 교육행정가들도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성원을 바랍니다.



2019-03-18_네 개의 기둥이 무너진 나라에서

       

〈교육〉, 〈종교〉, 〈언론〉, 〈사법〉은 모든 조직 구성에 필수 불가결한 네 기둥이다. 우리는 보통 이 네 기둥을 바탕으로 조직을 세운다. 조직의 안녕과 번영을 지켜주는 4대 천왕이라고나 할까. 이 네 기둥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조직은 무너진다. 


〈교육〉은 조직의 경영철학, 전략, 구조, 시스템, 프로세스를 공유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이 기능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이 기능이 없이는 조직을 구성할 수도 없고 인류문명을 발전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구성원들에게 중장기적인 비전을 심어주고 열정을 북돋아준다. 


〈언론〉은 조직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을 돕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견제하는 기능을 한다. 


〈사법〉은 잘못된 길로 이탈하지 않도록 심판하는 기능을 한다. 


이 네 기능은 조직의 네 기둥과 같아서 항상 신선함과 건강함으로 버텨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네 기둥은 모두 썩어 문드러졌다. 더 이상 조직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어찌할 것인가? 썩은 기둥을 걷어내고 다시 튼튼한 기둥으로 세워야 한다.      


교육에 대하여

                                                      (나머지 세 기둥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오늘은 교육이라는 기둥에 대해 알아보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엘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18살 나이였다. 어머니는 나를 등록금이 없던 교육대학에 들어가도록 종용했다. 초급대학이었던 교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5년간 근무했다. 그 당시의 경험은 내가 더 이상 교사로서 평생을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교육계는 너무 협소했고 답답했다. 교사들은 교장, 장학사 등과 같은 교육 행정가들의 밥이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행정업무를 해야 했고, 봉투들이 왔다 갔다 했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뒷전이었다. 교육 행정가들에게 잘 보여 교장이 되는 게 교사들의 꿈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교육계를 떠나 더 큰 물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했다. 세상이 운영되는 이치를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경영학을 별도로 공부한 후, 직장을 한국은행으로 옮기고 독일 유학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유학 중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다. 우리나라가 바뀌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 교육계는 나아진 게 없다. 아니 더 나빠졌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나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낙후된 강원도 시골의 3 학급짜리 분교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박정희 장군의 혁명공약을 외워야 했지만,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이담에 커서 훌륭하기 짝이 없는 박정희 장군 같이 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우주비행사, 화가, 장관, 과학자, 음악가는 물론이고, 바다를 본 적도 없는 아이들에게 선장이 되어 5대양 6대주를 다닐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개미들과 놀거나 콩밭 매는 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넓은 세상을 구경해야 한다는 꿈을 꾸면서 지냈다. 


요즘 강남 아이들의 꿈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본 기억에 의하면 아마도 건물주, 공무원, 유튜버쯤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아이들의 정신세계는 점점 오그라들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은 발전이 아니었다.     


그럼 대학은 나아졌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요즘 대학교수들의 표절 관행과 시간강사, 조교, 계약직 교원들을 구조적으로 착취하는 관행은 우선 차치하자. 70년대만 해도 경영학과에서는 두 종류의 경영학, 즉 미국 경영학과 독일 경영학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일본 경영학의 영향을 받은 나이 든 교수들이 경영학원론 교과서를 쓰면서 두 경영학의 차이점을 기술하고 가르쳤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단 하나의 경영학만 가르치고 있다. 세계는 미국식 경영학으로 통일되어 그것이 마치 글로벌 스탠더드 인양 가르치고 있다. 미국에서 양산된 경영학 교수들뿐인데 어찌하랴. 모든 학문분과를 포괄하는 경영학에서조차 다른 경영학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나라에선 무시해버리고 배울 수도 없다.      


교육학은 말할 것도 없다. 영재교육기관을 따로 운영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교육이 완전히 미국식으로 바뀌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영재성이 있는 학생들을 따로 모아서 가르치는 영재교육기관이 있는 나라는 미국으로부터 강력하게 영향을 받고 있는 나라들뿐이다. 유럽의 대륙 국가들 대부분은 영재교육기관을 따로 운영하지 않는다. 교육기관 자체를 완벽하게 평준화시켜 운영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인간을 자원(resource)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모든 학문과 이론이 쓸모(utility)의 관점에서 구성된다.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은 미국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이론이다. 이 행동주의 사상은 미국의 모든 학문분과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독일 대학에서 공부하는 기간은, 나에게 한국에서 배운 모든 것을 다시 검토하는 시간이 되었다. 심지어 그동안 한국에서 배운 것들이 혹시 나를 속인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갖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늘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면 그 관계 설정을 강제하는 조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유학생활을 보냈다. 이런 문제의식은 모든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아이고 세상에나, 내가 왜 이런 걸 모르고 있었지, 하면서 놀라곤 했다. 나에겐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다른 학문과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경영학뿐만 아니라 교육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아이들은 독일 초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교사들이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며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지 유심히 관찰했고, 의문이 나는 것은 교사에게 묻기도 했다. 독일의 교육이 우리의 교육과 크게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교육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된 이유도 알았다.      


유학기간 내내 관찰하고 경험한 것을 종합하자면, 결국 인간관(人間觀)의 차이였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일본식이나 미국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전후 독일에서 발전한 학문은, 인간의 존엄성(human dignity)이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학문 이론이 형성되었는데, 나는 이것을 독일제 인간관(human view made in Germany)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미국에서 개발된 학문은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인간을 자원(resource)이나 쓸모(utility)의 관점에 기초하여 학문 이론이 만들어졌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이것을 미국제 인간관(human view made in USA)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는 유독 미제와 일제를 선호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교육이 살아나려면, 우리는 이제 미국제 인간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과 교육, 인간과 역사, 인간과 조직, 인간과 경영이라는 주제로 4회 차에 걸친 강의와 대화의 기회를 마련했다. 교육혁신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윤진 선생이 이번 강좌 개설을 위해 수고를 많이 했다. 수고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충실하게 준비했다. 이번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라는 시리즈 강좌는 언제나처럼 〈사람숲협동조합〉에서 개설했다.     


아무쪼록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교육 행정가들의 많은 참여와 성원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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