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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비 Feb 10. 2022

초록불이 켜졌어도 우회전은 금지야

그린라이트로 보일지라도 조심해야 하는 이유

법이 바뀌었다. 보행자 신호가 들어왔을 때, 횡단보도라 할지라도 사람이 없으면 차량의 우회전이 가능했었던 건 작년까지다. 커다란 차가 보행자를 위협하듯 바짝 붙어서 대기하는 것을 차단함과 동시에, 우회전으로 인해 횡단보도에서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겁주거나 위협하지 않기 위한 법안이 올해부터 시행되었다. 한 달이 되어도 아직 바뀐 법을 받아들이지 못한 몇몇의 운전자들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차량 신호가 노란불일 때 무리해서 우회전을 하는 차량들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로서 초록불에는 무조건 보행자 우선이다. 차량의 크기도, 남녀노소도 상관없이 초록불이 켜지면 횡단보도에서 사람이 이동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초록불. 소위 우리가 "그린라이트"라고 부르는 그 단어는 영미권에서는 '허가, 승인'이라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지만, 국내에서 연애와 관련된 신호로 사용된다. 상대가 내게 호감이 있을 때 표현하는 어떤 신호로 받아들이는 걸 보면, 상대에게 나도 역시 다가가도 된다는 '허가'나 '승인'을 받은 것만 같다. 다음 스텝을 밟아도 되는 진행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영미권의 단어와 차이가 없다. 단지 국한된 범위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린라이트"를 "착각"한다. 연애 전 썸을 타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동안 여러 가지 그린라이트들이 비치겠지만, 일방적으로 마음이 한없이 커진 경우 그린라이트라며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아웃 오브 안중으로 '그는 내게 반한게 틀림없다'라고 '이건 확실하다'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외치기까지 한다. 그(혹은 그녀)는 너무 멋있다며 신나게 설명한다. 곁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이 사랑의 실패로 받아들여야 할 상처의 크기까지 이미 가늠되기 시작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본인만 보이지 않는 마음의 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위험해 보인다. 그것은 마치 상황이 터지기 전까지 폭탄인지 모르고 끌어안고 있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그런 연유로, 그린라이트의 방향성은 중요하다. 너와 나의 마음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지, 일방적이지는 않았는지 마음의 크기가 더 커지기 전에 염두해보아야 한다. 그 방향성을 알아가는 것 역시 썸의 일부다. 마음의 크기에 따라 어떤 이는 보행자의 역할을, 어떤 이는 차량의 역할을 맡는다. (혹은 둘 다 보행자이기도 혹은 둘 다 차량일 수도 있다.) 어떤 포지션에 어떤 크기로 서있더라도 양자 간에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못하고 방향성을 잃어버린다면 그 길은 아수라장이 될게 뻔하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피 말리는 파국이 시작될 때면, 대부분 사랑하는 쪽은 덤프트럭만 한데 사랑받는 쪽은 상대적으로 작고 여린 보행자였다. 방향성이라도 맞으면 덤프트럭에 태우면 그만이련만, 방향성이 다르면 어느 한쪽은 다치고야 만다. 난 그 정도는 아니야. 그만 다가와줬으면 좋겠어. 


상대방의 마음을 모르는 상태로 일단 고백하기를 시전 하고, 이제 너도 결정해라고 말하는 순간들은 어쩌면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지나갈 때까지 바짝 붙어 기다리는 차량에게 느끼는 위협이다. 고백받는 상대방 역시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도 충분히 폭력이자 가스 라이팅이 될 수 있는데도 이미 쓰인 콩깍지 덕에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직진인데, 너는 우회전이었다면 각자의 길을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하고, 그러다 다시 만나던, 한쪽이 방향성을 틀어 함께 가려고 시도하든 간에 양자 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일어나려면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쉽고도 쉬운 원리를 자주 망각한다. 마음의 온도(속도)와 방향성이 맞아야 썸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있다. 



너무 조급하지 않아도 된다. 방향성이 다른 일에는 어쩔 수 없다. 상대의 방향을 틀어 내게 향하게 한다 할지라도 얼마 못가 각자의 방향으로 다시 갈 수밖에 없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고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게 사람인지라 별수 없는 일이다. 상대방이 나를 봐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할 게 아니라, 상대방과의 유대관계를 쌓으며 천천히 간극을 좁혀가는 일만 해도 충분히 행복하고, 그저 상대방과 함께하기만 해도 행복한 게 사랑이 아니던가. 사귀자! 하고 확 끌어안고 뽀뽀하고 연인이라 규정하는 일이 연애의 전부는 아니니까. "사귀어서 뭐하게?"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 나의 친구 덕에 현타를 맞고 쓰는 글이다.


그냥 생각이 나서 연락하고, 가볍게 차 한잔 편안하게 마시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랑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왜 꼭 사귀어야 하는지, 그저 좋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지, 저 사람이 반드시 나의 어떤 것으로 귀속되어야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자신을 알아가는 것부터가 이 관계의 시작이겠다. 나의 마음이 크다고 너에게 강요할 수 없다. 나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장 너에게로 달려가! 성급하게 우회전하고! 부리나케 너 앞에 짠! 하고 다가서는 일은 명백히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행위다.


좋아하는 마음이 티가 나지 않을 수는 없다. 밥 먹고 차 마시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좋아하지 않는 마음도 느껴진다. 이미 우리는 그 낌새를 알고 있지 않은가.(연락이 잘 안 된다거나, 약속을 피한다거나.. 등등)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는 일처럼 느껴진다면 상대방에게 굳이 무리해서 마음을 표현하려고 애쓰지 말자. 은연중에 알게 되는 것들로도 충분히 상대방은 느끼고 있다.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혼자 그린라이트라며 설레발치기보다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순간을 사랑하자. 부쩍, 사람이 내 맘 같지 않아 힘들고 썸을 규정하는 일이 어렵다면, 상대방과 차곡차곡 쌓여갈 신뢰관계를 믿고 천천히 행복한 순간들에 조심스레 발을 들이면 된다. 계속 행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행복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올 것이고, 그 이후에 벌어질 아주 신뢰 깊은 좋은 관계에서 나타나는 정상적 퇴행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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