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마
리스본에선 매일 숙소를 옮겼다. 수도라 그런지 가장 저렴한 호스텔도 20유로가 넘었고, 정어리축제 기간이라 숙소가 거의 풀부킹이었기 때문이다. 난 3가지 다른 집을 경험해볼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축제 덕분에 도시 전체가 흥이 유난히 넘쳤다.
둘째 날은 신트라, 호카곶, 카스카이스 한국어 투어를 들었다. 순례길에서 만났던 마라토너 아저씨도 이 투어를 신청하셨다고 해서 따라 신청했다. 리스본 여행일정이 겹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개인여행자들끼리 점심식사를 한 테이블에서 앉았다. 마라토너 아저씨와 남자분 한 명이랑 같이 앉았다.
같이 그린와인 샹그리아를 주문했다. 알고 보니 처음 본 분은 대학교 동문이었다. 신기한 만남이었다. 참고로,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게 그린와인이다. 청포도로 만들어서 그린와인이고, 술 색깔은 초록색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간단한 지식을 가이드분께서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5년 넘게 직접 이곳에 사시면서 피부로 느끼고 배우신 경험과 정보들이라 귀중했다.
투어가 비싼 만큼, 일정도 가득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따라다니니 시간이 금방 지났다. 호카곶은 바리케이드 쳐져서 구경을 못해서 아쉽긴 했지만. 젊은 애들이 사진 찍다가 헛디뎌서 바다에 빠져서 구급차가 왔더라.
저녁엔 셋이 같이 아시안푸드코트에 가서 식사를 하며 진자(Ginja)를 마셨다. 진자는 체리술인데, 작은 초콜릿 잔에 조금씩 따라 마시는 것이 일품이다. 마라토너 아저씨가 오비도스에서 진자를 사 오셔서 나눠 마실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그 이름을 드디어 알게 됐다.
포르투에서 8년 전에 루이스다리 앞에서 많이 팔아서 1잔에 1유로에 즐겁게 마셨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 술이 진자인 줄은 모르고 포르투갈에 오면 또 마실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진자 양이 꽤 많아서, 술이 남았다. 그래서 3일 차에 또 점심을 먹기로 했다.
또 아시안푸드코트 갈 줄 알았는데 연달아 가긴 질리지 않냐고 마라토너 아저씨가 새로운 제안을 하셨다. 숙소를 매일 이동해서 무겁게 배낭을 메고 다녀야 했는데 아저씨가 숙소에 가방도 맡아주셨다. 덕분에 가벼운 심신으로 해물밥으로 유명한 매번 긴 줄이 서있는 피노키오라는 곳에 갔다.
해물밥과 샹그리아를 주문해서 맛있게 즐겼다. 해물밥은 새우와 고수가 들어가서 태국 똠양꿍 같은 맛이 났는데 간이 상대적으로 심심해서 맛있었다. 포르투갈 음식은 자극적이지 않아서 쉽게 먹을 수 있는 편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은근히 매운 것을 잘 먹는 것에 자부심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포르투갈 나름의 독자적인 매운 소스인 삐리삐리 소스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가 간 피노키오 식당에서도 빨간 삐리삐리 소스 한 병을 내어주셨다. 병에 초록색 수건을 스카프처럼 둘러놔서 신기했다. 알고 보니 삐리삐리 소스가 흐를 수 있으니 예방적으로 한 조치였다. 한국 가면 오일 병 같은 거에 천을 둘러봐야지. 난 맵찔이었는데 식당에서 나온 삐리삐리 소스는 맵지 않았다. 해물밥에 간장처럼 뿌려먹기 좋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샹그리아의 마지막 잔을 마시고 있었다. 난 이야기하다가 관련한 경험이 떠오르면 그 기억을 혼자 곱씹는 편이다. 그렇게 멍을 때리다가 손이 미끄러졌고 잔이 엎어졌다. 바로 옆 작은 탁자로 떨어져서 잔은 멀쩡했으나 얼음과 샹그리아 과일이 한가득 바닥으로 벼락 맞은 듯 떨어졌다.
바로 웨이터 아저씨가 달려와서 걱정하지 말라고 자리를 다 치워주셨다. 계속 치워주시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다. 원래 걱정은 없었는데 진짜 민망했다. 호호. 잔의 절반 이상의 술을 흘렸다. 술로 끈적하고 미끄러질 수 있는 바닥에 소금을 뿌려주셨다. 마치 오줌싸개가 된 듯했다.
자리를 치워주시면서 다시 새로운 술 가져다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를 주로 하셔서 술을 다시 가져다준다는 얘기는 그냥 지나가는 소리인 줄 알았다. 왜냐면 이미 엎질러진 술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잔이었고 일행들 잔도 다 비었기 때문이다. 근데 진짜 자리 다 치워주시고 술을 원래 샹그리아 병에 3분의 1 정도 다시 채워서 가져다주셨다. 포르투갈의 접객을 제대로 경험했다.
웃으며 일행들이랑 다시 샹그리아 한 잔씩 나눠마셨다. 잊지 못할 엎질러진 술이었다. 리스본은 일행이 있어서 별 일을 특별히 하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정말 잘 갔다. 리스본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배도 파도 근교도 가봤다. 정어리축제더라도 혼자였다면 정어리구이 안 먹었을 텐데 일행이 있어서 정어리축제에서 정어리구이도 먹었다. 작은 꽁치 맛이었다.
아시안푸드마켓에서 2일 차에 남은 진자를 마저 비우며 리스본여행을 마무리했다. 마라토너아저씨와 학교동문오빠 덕분에 리스본은 특별한 계획도 없이 구경을 다 했다. 두 분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난 코임브라로 넘어왔다. 코임브라 숙소는 특별하게 이층침대가 아니라 원룸으로 내 방이 있다. 화장실과 부엌을 공유한다.
숙소 앞에 도착하자마자 소나기가 내렸다. 오랜만에 생긴 나만의 방에 바깥으로 나가기 싫더라. 1분 거리엔 알디라고 대형마트도 있다. 그래서 비가 잠깐 그친 틈을 타 알디에 가서 장을 봤다. 저녁엔 닭죽을 끓여 먹었다. 밤새 비가 세차게 왔다.
오늘도 오후 4시까지 비 온다고 해서 닭죽 남은 걸 또 끓여서 먹었다. 요리를 하면 손이 커서 너무 많은 양의 음식이 남는다. 아마 이 닭죽은 저녁까지 먹어야 다 먹을 수 있을 듯하다. 세끼가 그렇게 해결된다. 몇몇 주변 분들이 나보고 탱탱볼 글 안 쓰냐고 영상 안 올리냐고 연락을 주셨다. 채찍질 감사하다.
꾸준히 탱탱볼로 활동하니까 나를 탱탱볼로 불러주시고 탱탱볼을 자주 찾아주신다. 탱탱볼이 되기로 한 건 이미 엎질러진 술이다. 순례길이 끝났다고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닌데 인간인지라 느슨해졌다.
이제 다시 혼자가 되었고 비가 그치고 해도 뜬 것 같으니 빨래하고 동네 구경 나가봐야지. 탱탱볼이 가만히 집에만 박혀 있는 건 말이 안 된다. 탱탱볼답게 다시 힘껏 튀어봐야지. 또 기록해야지. 기다려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