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계획대로야
포르투 방문이 세 번째라 그런지 특별히 뭘 봐야겠다는 욕심이 없다. 물론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한 번에 욕심부려서 휘몰아치듯 다니면 금방 휘발되어 버리더라. 다음 방문을 위해 아껴두기로 하고 오늘은 일상여행을 했다.
오전엔 지난주에 포르투 도착했을 때 만났던 순례자부부 분들을 다시 만났다. 덕분에 와이너리 투어를 알게 되어 따라 신청할 수 있었다. 평소에 나라면 비싸서 가이드 투어를 찾지 않는다. 하지만 도우루 포도밭에 가는 경험은 쉽게 살 수 없는 거였고 이건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두 분은 오늘 저녁에 포르투갈의 성 미켈 섬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신단다. 다행히 빠르게 연락이 돼서 11시에 체크아웃하시고 내 숙소에 잠시 짐을 두고 같이 시장을 돌아다녔다. 일정이 맞아서 포르투에서 다시 뵐 수 있어 다행이었다. 포르투에서 지하철을 안 타봐서 티켓 끊을 기회가 없었는데 두 분을 배웅하며 끊어보았다.
내가 쓰던 리스본 교통카드와 리스본 카드도 드렸다. 부디 도움이 되길. 포르투갈은 참고로 얇은 종이 교통카드에 비싼 칩이 내장되어 있는지 0.5-6유로에 판매한다. 그 카드가 있어야 비용을 충전해서 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다.
지난 2월에 라오스에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커트하고 한동안 미용실을 못 갔다. 회사 다닐 땐 복지성격으로 지급되는 자기 관리비를 받으려고 매월 미용실에 갔는데 말이다. 한 달에 꼭 한번 미용실 가기가 습관이 돼버렸다. 여행 와서 미용실을 세 달 넘게 안 갔다. 미용실이 너무나 가고 싶어졌다.
머릿결이 빗자루 같이 푸석푸석해진 것도 한 몫했다. 순례길 내내 오랫동안 탈색한 머리를 올인원 샴푸나 비누로 머리를 감고 헤어드라이기가 없어서 제대로 말리지 못한 탓이다. 곧 한국 가서 가야지 미뤄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미용실에 다녀왔다.
바깥에 커트 가격이 쓰여있는 곳을 갔다. 가격을 미리 알고 잘라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브라질 남자 미용사가 하는 곳이었는데 꽤 손님이 많아서 기다렸다. 브라질 사람들이 아무래도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아니까 꽤 포르투갈로 이민오는 사람이 많더라. 옛날엔 포르투갈 사람들이 브라질에 돈 벌러 갔다던데 오히려 브라질 사람들이 포르투갈에 오는 반대되는 요즘의 상황이다.
미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음료 하나를 마실 수 있더라. 이런 문화는 한국이랑 똑같아서 반가웠다. 선택지에 맥주도 있길래 맥주를 마셨다. 미용실에서 맥주라니 신기했다. 술을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져서 술을 즐기진 않는데 작은 병이라 가볍게 마시기 좋았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단발로 커트할 예시사진을 보여주자 척하면 척 알아서 잘라주셨다. 어차피 예시는 예시일 뿐. 동그란 얼굴이라 단발로 자르면 더 동그라 보인다. 탱탱볼과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니 오히려 좋다.
미용사는 열심히 머리를 매만져주셨다. 머리를 감겨주신 후 젖은 머리를 부분 부분 집게로 집은 후 중심부터 정성스레 커트해 주시고 열심히 빗질해서 말려주셨다. 걸리적거리던 머리카락을 덜어내니 가볍고 시원해졌다. 그냥 커트를 요청했는데 스타일링을 해주셨고 25유로를 내야 했다. 내 숙원사업이 말끔히 해결되었으니 흔쾌히 25유로를 냈다. 참고로 그냥 커트는 15유로고 스타일링은 25유로다.
기세를 이어 한인마트에 가서 김치 사고 마트에서 장 봐서 밥을 해 먹었다. 혼자 아등바등 대면서 고기를 구우려 하니 같은 숙소에 머무는 친구들이 소금, 후추, 오레가노, 올리브유를 찾아주었다. 서로 언어가 달라도 마음으로 통하는 순간이다. 알고 보니 이전에 숙박했던 사람들이 남겨두고 간 유산들이 모아진 보물창고가 있더라. 나도 누군가가 남겨두고 간 양념으로 요긴하게 썼으니 남은 쌀은 남겨두고 가야지.
지금 숙소는 자동 체크인으로 운영되어 따로 상주하는 직원이 없다. 그래서 에어비앤비 느낌이 더욱 난다. 배정된 침대, 부엌, 화장실, 거실을 내 집처럼 알아서 눈치껏 잘 쓰면 된다. 방엔 이 층침대가 2개 있고 네 명이서 같이 쓴다. 다들 또래라서 금방 대화하고 친해질 수 있어 좋다.
이제 내일이면 친구들을 만나러 스페인, 프랑스, 독일 순으로 떠난다. 쾌적하게 가고 싶어서 배낭에 모든 빨랫감을 넣고 숙소 근처 코인세탁방으로 향했다. 돈 내고 기계가 척척 세탁해 주는 게 기특하다. 순례길 내내 어설픈 손빨래를 했던 것이 아쉬워서일까. 거품 팡팡 스핀 훅훅 돌아가며 열심히 작동하는 것을 앉아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행복하다. 이게 바로 빨래멍? 이런 사소한 것에도 즐거움을 느끼고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에어비앤비에서 여행은 살아보는 거랬는데 나는 그 철학에 세상 충실한 여행자다. 실제로 에어비앤비에서 숙소를 예약해서 미용실 가서 머리 자르고 시장 가서 식재료 구경하고 동네마트 가서 장보고 근처 코인세탁방 가서 빨래한 하루를 보냈다.
대화가 안 통하는 타지에서 일상을 여행하다 보면 얼마나 단조로운 서울에서의 삶이 소중한 것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일상이 지루하고 팍팍하게 느껴져서 여행을 떠나왔는데 그 지루함이 사실은 얼마나 따뜻한 안정감을 주는지. 지금이라도 알아차렸으니 다행이다. 이번 여행으로 정말 큰 것을 얻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계속 일상여행을 이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