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돈을 더 냈다면.
이동이 없는 날 아침은 유난히 상쾌하다.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밤에 천둥번개가 들이치고 비가 와서 평소보다 추웠다. 방에 에어컨은 신기하게 따뜻한 바람이 나와서 밤 사이 푹 잤다. 덕분에 빨래도 아주 바짝 말랐다. 빨래가 빠삭하게 마른날은 기분이 좋다. 주말부터 계획이 아직 미정이라 다시 고민에 빠졌다. 특히 이번주 주말은 부활절이 껴있어서 보통 다들 쉬고 가족들이랑 보내기 때문에 어디로 향할지 더욱 고민됐다.
내가 당장 생각한 여행방법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야간버스를 타고 크게 이동하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나라가 바뀌어있다. 두 번째는 이탈리아 어느 산골 노부부 에어비앤비에서 한 달을 머무는 것이다. 아침을 제공해 주고, 딸이 부모님 집을 소개한 정보를 보니 따뜻한 느낌이 들더라. 세 번째는 순례길을 걷는 것이다. 이탈리아에는 비아 프란체 지나라는 순례길이 있다. 매일 배낭 하나 메고, 두 발로 직접 작은 소도시를 만나는 재미가 있다. 프랑스 순례길 한 달, 포르투갈 순례길 일주일, 올레길 2주를 걸어본 적이 있어서 걷는 여행은 익숙하다.
엄마랑 잠깐 영상통화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았다. 어차피 세 가지 방식 모두를 경험하게 될 테니, 지금 끌리는 것을 하자! 덕분에 야간버스를 또 예매했다. 점점 환전한 유로가 고갈되어 간다. 유로가 오늘도 1,436원으로 마감했다. 1,400원 미만으로 떨어지길 바라면서 잠들지만 역시나 또 올랐더라. 최소 50유로씩 환전 가능하니 추이를 지켜봐야겠다.
레미가 자기가 바리에서 유명한 파스타맛집 찾았다고 점심 같이 먹자고 했다. 노르마도 합류했다. 오늘에서야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됐다. 어제 제니라고 적었는데, 레미랑 이름을 헷갈렸다. 레미는 라따뚜이에 나오는 요리하는 쥐이름이랑 똑같다며 열심히 본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호호. 노르마는 j발음이 ㅇ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나를 밍유로 불렀다. 난 어떻게 불리든 괜찮았다. 다만, 레미처럼 뭔가 스토리를 설명하는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내 이름을 기억하기 좋은 스토리를 고민해 봐야겠다.
숙소가 바리 중앙역 근처라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동네 마실 나가듯 셋이서 집을 나왔다. 레미가 한국어로 아저씨라는 단어를 안다고 했다. 오빠, 언니를 한국어로 어떻게 말하냐고 묻더라. 답해줬더니 그럼 자기가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지 물었다. 자긴 28살이라고. 동갑이라고 말했다. 나를 20살로 봤다고 했는데 동갑이라 놀랐다고 했다. 94년생 친구를 숙소에서 만났다. 노르마는 우리 둘을 "씨카"(스페인어로 숙녀라는 뜻)라고 불렀다.
이탈리아 와서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어보는 것이 오늘이 처음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물 마실 거냐고 묻는다. 탄산 없는 일반 물 한 병을 주문했다. 탄산수 sparkling water 도 있어서, 우리나라 물처럼 일반 물 마시고 싶으면 still water를 달라고 하면 된다.
음식 메뉴 주문은 QR코드 스캔을 통해서 사이트에서 주문이 가능했다. 레미와 노르마는 치즈가 올라간 2유로 비싼 파스타를 시켰고, 나는 가장 기본 파스타를 시켰다. 노르마는 파스타가 나오자마자 이건 와인각이다 싶었는지, 와인 한 잔을 추가했다. 면이 말랑하면서도 바삭하고 짭조름해서 진하게 맛있었다. 나도 어디 가면 빠르게 먹는 편인데, 레미는 진짜 빨리 접시를 비웠다. 우리 모두 접시를 깔끔하게 설거지했다.
명세서를 달라고 했다. 노르마가 "일 꼰또 뻬르빠보르"라고 말하면 된다고 알려줬다. 종업원한테 똑같이 말했는데 발음이 모자란 지 한 번에 못 알아들었다. 이렇게 또 부딪히며 하나 배운다. 대표 결제를 맡은 레미가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자릿세(Servizio, coperto)를 받는다고 알려줬다. 인당 2 유로였다. 카페에서도 서서 먹는 게 아니면, 자릿세를 낸다고 했다. 어쩐지 카페에서 어제 0.5유로 더 받던데 이제야 알았다.
이탈리아의 자릿세는 중세시대 여관에서부터 유래됐다고 한다. 여관 주인이 손님한테 음식 팔고 싶은데, 자꾸 손님들이 음식을 챙겨 와서 먹더라는 거다. 아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비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탈리아는 자릿세는 필수적으로 부과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팁문화는 약한 편인 듯하다. 레스토랑이 먼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정찰제인 자릿세를 당당히 징수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손님인 내가 팁을 얼마나 줘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레미가 숙소 돌아가는 길에 액상 전자담배를 사야 한다고 했다. 아까 오는 길에 봤다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고 했다. 식당 밖을 나오자마자 노르마가 담배를 꺼냈다. 노르마도 흡연자였다. 레미도 담배 한 개비를 얻어 핀다. 식후땡을 둘이서 하더라. 노르마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레미가 담배 피우는 것에 놀랐다. 보통 미국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해 규제가 심하다고 하더라. 미국에 안 가봐서 몰랐다. 레미는 보통은 그런데, 본인은 중국-일본 혼혈이라고 답했다.
무사히 액상담배 샵을 들어가 레미는 냄새가 오래 지속되는 향 좋은 걸로 담배를 샀다. 구매하자마자 바로 피더라. 나는 담배를 안 펴서, 담뱃값으로 돈을 안 써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르마는 중앙역에 들려 내일 같이 여행할 근교 기차 티켓을 끊었다.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친구가 있으니 이럴 때 편하다.
집에 돌아와서, 커피를 마셨다. 노르마가 토블론 초콜릿을 디저트로 나눠줬다. 이탈리아 모카포트가 하이라이트에 작동이 안돼서, 하이라이트가 인식하는 냄비에 물을 붓고 모카포트를 담갔다. 엄청 힘겨운 과정을 통해 내린 소중한 커피. 딱 에스프레소 2잔이 뽑아지더라. 베트남에서 산 드리퍼를 꺼내 커피를 더 내렸다. 노르마가 내 드리퍼를 보고 실용적이라고 칭찬했다.
레미가 내일 갈 곳의 사진들을 브리핑했다. 음식은 여기가 유명하니 뭐를 먹어야 하며, 어디서 봐야 풍경이 예쁜 지 상세히 알려준다. 그리고 내일 저녁 6시에는 일해야 한다며, 그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직장인은 역시 신데렐라) 일정이 늦어지면 노르마와 나는 나중에 돌아오라고 일러준다. 레미는 MBTI J가 분명하다. 계획하길 좋아하는 J인 친구를 따라다니면 편하다.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알아서 이미 일정이 짜여있기 때문에 굳이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나도 J인데, 배가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가기 때문에 완전 극 J를 만나면 모든 결정권을 양도하고 따르는 편이다.
레미는 뭐든 열심히다. 낮에는 여행하고, 밤에는 일한다. 그리고 열심히 가야 할 여행지 정보를 찾는다. 나는 모든 것에 다 에너지를 쏟을 자신이 없어서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일과 여행을 병행하는 동갑내기 레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레미가 방에서 일하는 소리를 들으니, 집에서 일할 때 생각이 났다. 이미 홍대 5번이나 가봤다고 홍대를 좋아한다고 한다. 내가 홍대 산다고 하니까, 여행을 많이 다닌 나랑 친해지면 홍대 맛집을 제대로 알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내일 체크아웃하고 늦은 밤에 버스를 타야 하는데, 레미가 내 배낭도 맡아준다고 하고 본인 방에서 쉬다 가라고 말해주는 착한 친구다. 저녁엔 파스타도 만들어줬다.
커피 타임 후 주말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다음 주에 넘어가면 좋을 도시들과 일정을 추렸다. 혼자라서 짐도 배낭 하나라서 어디든 가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설렌다. 다행히 옛날에 독일에서 1년 교환학생할 때 이미 방문해 본 친숙한 도시들이 많다. 덕분에 꼭 가야 하는 곳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다. 어제부터 고민한 끝에, 방문 일정이 결정된 도시는 바로 3곳이다. 모두 야간버스를 타고 넘어간다.
잠깐 밖에 다 갔는데 날씨가 비가 오다가 말다가 바람이 불다가 말다가 오락가락했다. 이런 알쏭달쏭한 날씨에 따뜻하고 아늑하게 휴식할 수 있는 집이 있어 다행이었다. 덕분에 편안하게 걱정 없이 여행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사귄 외국친구들이랑 여행이라 내일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