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6일 차: 청개구리 본능

일행들과 헤어지고, 다시 혼자가 되다.

by 탱탱볼에세이

어제 묵은 숙소에서 빌바오는 꽤 거리가 있어서, 중간 마을에서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다들 빌바오 갈 때 나는 멈춘다. 아쉽지만 일행들과도 헤어졌다. 약간 뒤처지는 기분이 들지만. 아무렴 어떠리.


나는 가끔 이렇게 남들이 다 가는 선택이면, 청개구리 본능이 어김없이 발동한다. 끝내 다른 선택지를 택한다. 그 붐비는 데에 나까지 합류하면 더 붐비기 때문이다. 최대한 경쟁이 많은 곳은 피하고 싶다.


분명 경쟁이 몰리면, 상대적으로 경쟁이 적은 곳도 있기 때문이다. 경쟁이 적은 곳에서 여유를 즐긴다. 덕분에 다들 바삐 서둘러 걸어갈 때, 나는 누구보다 천천히 걸었다.


크록스 신고 걸으니 조금 절뚝거리니 다들 발 아프겠다고 걱정해 준다. 발이 아프긴 하지만 물집 때문이다. 물집을 터뜨리고 빨간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으면 생각보다 괜찮다. 사실 이런 걸 다 견뎌보려고 온 길이다.


순례길은 평소와 다른 길고 험궂은 과정이기 때문에, 인내심과 끈기를 필요로 한다. 그렇게 내리 한 달을 넘게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성취감과 희열이란. 그 맛을 잊지 못해서 예정에 없었던 북쪽길을 또 이렇게 걷고 있다.


며칠 전 숙소에서 친해졌던 네덜란드 아저씨를 이 마을에서 또 만났다. 체크인 전 숙소에 미리 들어갔다가, 침대를 이사해야 했던 동지였다. 그때 아저씨 침대 번호가 11번이라, 우린 그를 11번 아저씨로 불렀다. 먼저 마을에 도착하셔서 바에 앉아계셨다. 이미 웬만한 순례길을 점령한 지 오래. 북쪽길도 이번이 2번째란다.


같은 숙소에 머물 예정이라 체크인 시간 3시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저씨한테 지금 6개월 여행 중이고, 여행이야기를 엮어 출판할 것이라는 나의 계획을 공유했다. 아저씨도 글에 등장하냐고 물어보셨다. 당연하다고 11번 아저씨로 등장한다고 답했다. 아주 만족해하셨다.


왜 까미노를 걷냐고 물어보셨다. 기존에 걸었던 까미노의 기억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한국에서는 뭐든 경쟁이라 앞만 보고 달리는데, 까미노는 여유를 즐길 수 있어서 매력적이다. 걸으면서 다양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도 듣고, 좋은 풍경 나오면 잠깐 멈춰서 즐기는 거다.


다만 까미노 걷는 사람들이 많아서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을까 봐 약간의 경쟁심이 느껴지는 건 있다. 아저씨도 4년 전 북쪽길에 비해 확실히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말씀하셨다. 코로나 동안에 까미노 블루를 앓던 사람들이 지금 온 것이 아닐까 추론하셨다. 역시 까미노 블루를 극복하는 데는 다시 까미노를 걷는 게 최고인가 보다.


어제는 게르니카 알베르게가 닫혀있어서 호텔에서 비싸게 주무셨다고 한다. 어제 만났을 때, 게르니카 다음 마을로 간다는 내 말 듣고 따라갈 걸 그랬다고 아쉬워하셨다. 어제 숙소 밥 아침저녁으로 맛있긴 했다.


오늘은 다들 빌바오로 향해서, 여긴 경쟁이 없다. 우리가 1등으로 들어와서 침대를 고를 수 있었다. 아저씨가 고른 침대가 또 11번이었다. 아저씨도 고르고 나서 보니 11번이라 둘이 웃었다. 잘 온 것 같다. 여긴 모두 1층 침대기 때문이다. 덕분에 평화롭다.


아무도 2층을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하루종일 걷고 밤에 2층침대인 숙소를 가면 2층에 올라가는 게 큰 부담이다. 2층 침대를 한번 올라가기도 어렵지만, 다시 내려오기는 더욱 어렵다. 다만, 숙소에 와이파이가 안 돼서 별 하나 깎는다.


빌바오는 바스크 지방의 주도로 큰 도시라고 한다. 길을 걸어오다 보면, 바스크 지방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히 느껴진다. 바스크 독립을 원하는 그라피티도 많고, 스페인어로 인사하면 꼭 바스크어로 새로 알려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바스크의 주도인 빌바오가 더욱 기대된다.


오히려 오늘 갈 것을 내일로 아껴둔 기분이라 설렘이 더해진다. 여기서 빌바오까지는 부담이 적은 거리라 다리 아플 걱정도 없다. 사실 오늘 빌바오까지 가려고 마음먹으면 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내일도 걸어야하기 때문에, 너무 무리해서 걷고 싶지 않았다.


옛날에 산티아고 가야 하는 일정이 정해져 있을 땐, 조급하게 서둘러서 걸었다. 며칠 무리해서 걷다가 무릎이 아팠던 경험이 있다. 무릎이 아프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아픈 동안 고생을 했다. 때문에 무릎은 최대한 안 아프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도 물집은 내 친구다. 매일 부풀어 오른 물집을 터뜨리고 있다. 나름 순례길이랑 올레길을 걸어본 편이라, 더 이상 내게는 물집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을 단단히 빗나간다. 처음 걷는 것처럼 물집이 또 생겨난다. 물집이 났던 곳을 도려냈는데 그 옆에 퍼져서 또 생기더라. 주인이 험난하게 걸어서 발이 물집으로 티를 내나 보다.


사실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을지 상상이 안된다. 나보다 어르신들이 많이 걷지만, 젊은 사람들에게도 힘든 길임은 분명하다. 체력이 허락해서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 만나는 순례자들끼리 하는 인사도 그런 염원을 담는다. 부디 산티아고에서 무사히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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