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카페를 꿈꾸던 당시에는 동네에 카페가 한 개 있었다. 우리동네가 면소재지라도 진주와 서울을 오가는 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정차하고 지리산과 지리산둘레길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다방은 너덧 군데 보였으나 카페라고 이름 붙인 곳은 한 곳 뿐이었다. 그마저 문을 닫아놓는 시간이 더 많았다. 우린 그 카페가 머잖아 아주 문을 닫을 거라고 예감했고, 우리 예감은 적중했다. 마침내 카페 출입문에 점포세를 낸다는 종이가 나붙었다.
“시설비 권리금 1,500만원 / 보증금 1,000만원에 월 40만원”
물론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카페해서 돈 못 번다. 고생만 하다가 망해서 접더라. 지금은 프랜차이즈카페가 대세다. 등등…, 하지만 그때는 어떤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우리자매는 그 카페를 인수했고 ‘푸실’이라고 지었다. ‘풀이 우거진 마을’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거금을 들여 커피머신을 사들이고 간판을 만들어 붙이고 실내인테리어를 아늑하고 편안하게 바꿨다. 그때가 카페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손님이 제법 찾아왔다. 그들은 정성 담긴 수제음료에 만족했고, 이런 분위기 있는 카페가 동네에 생겨서 좋다고들 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물론 아닌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저녁에는 독서모임과 회의장소로 사용하기도 했고, 책출판회와 강연장으로 대여하기도 했다. 운이 좋아 일본가수 ‘하찌’의 공연을 연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북적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큰길 쪽에 프랜차이즈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디아, 더웨이닝, 요거프레소 무려 세 개가 경쟁하듯 한꺼번에 생겨났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곳 또 한 곳, 대형카페가 문을 열었다. 작은동네에 카페가 무려 열 개가 넘었다. 우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쿠폰을 만들고 가격을 내려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월세를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월세를 마련하려고 나는 도서관이나 지역아동센터에 글쓰기수업을 나가고 동생은 손바느질 원데이 클레스를 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가 터졌다.
한때 꿈이었던 카페를 닫기로 했다. 철학자 강신주가 어느 강연에서 ‘꿈은 이루고 나서 버려라!’고 했던 말을 동생과 주고받으며 위로했다. 권리금 없이 카페를 내놨지만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모를 막막한 상황에서 선뜻 인수하려는 이는 없었다. 하루하루 보증금만 까먹다가 업종을 바꿔서 카페를 정리했다.
통장잔고를 보면서 동생과 나는 헛웃음을 웃었다. 꿈을 이룬 대가치고는 이만하면 괜찮다고…, 지금부터 열심히 모아서 또 다른 꿈을 이뤄보자고…, 웃, 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