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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화 Jan 24. 2022

수 놓는 시간

색실로 그림을 그리다


마음 어수선한 날은 수를 놓는다.

수를 잘 놓는 건 아니다. 따로 수놓기를 배운 적도 없다.     

학창시절 가정시간에 살짝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새틴스티치, 체인스티치, 버튼호울스티…,

아마 시험에 자주 나와서 외웠을 것이다.      


처음엔 제멋대로 수를 놓았다.

'천에 색실로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빨갛고 노란색실로 꽃잎을, 초록과 연두색실로는 이파리를 만들었다. 삐뚤빼뚤 엉성해서 몇 번을 풀었다가 다시 놨다. 다 놓고 나서보면 유치원생이 그린 그림 같았다. 동생은 내 작품(?)을 보고 ‘대단히 인간적이다!’고 칭찬했다. 너무 잘 놓으면 기계수로 착각한다나.

  

어느 날은 카페에 찾아온 손님이 내가 수놓아 만든 찻잔받침을 보고 감탄을 했다. 자수가 수수하고 투박해서 마음에 든다는 거였다. 미리 만들어놓은 게 있어 보여주었더니, 한 장에 오천 원씩 붙여서 모두 사갔다. 합천에서 전통찻집을 하는 분인데 우리가 쓰던 것까지도 다 들고 갔다. 지금도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수를 놓으면 머릿속이 고요하고 맑아진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오디오북을 들으며 수를 놓다보면 시간은 또 얼마나 감쪽같이 지나가버리는지…. 수를 놓으면서 지난 일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너무 바쁘게만 달려오느라 급히 삼킨 날들을 되새김하는 시간이 된다. 다만 오랜 시간 수를 놓으면 온몸이 쑤셔서 이따금 기지개를 켜고 스트레칭을 해줘야 한다.      


나는 들꽃을 즐겨 놓는다. 장다리꽃, 씀바귀, 산자고, 물봉선…,  봄부터 가을까지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만난 들꽃을 떠올린다. 매번 구상한 것과 다른 꽃이 완성되지만 그마저도 예쁘다. 밋밋한 조끼나 앞치마에도 수를 놓아본다. 작은 포인트 하나 더했을 뿐인데 세상에서 유일한 나만의 옷이 완성된다.   

   

요즘 쓸데없는 고민이 생겼다. 점점 수놓는 실력이 좋아진다는 거다. 아주 빼어나게 좋아지면 고민이 아닌데 어중간하게 좋아진다. 그리하여 내 첫 작품을 보고 동생이 칭찬했던 ‘인간미’를 잃어가고 있어 고민이다. 내 수놓기가 인간미 빼면 시체인데 말이다. 예전의 수수하고 투박하던 수놓기로 되돌아갈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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