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툰자 Dec 17. 2020

대체불가능한 선물

퍼즐 조각은 모두 주인공

헤어지던 날, 담임 선생님은 얇은 책 한 권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2학년 2반 아이들 모두 주인공으로 나오는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 개성 넘치는 열여덟 명 아이들 사진과 있었다. 그림도 그리고 사인펜으로 화사하게 꾸민 편지도 감동이었지만 삐뚤빼뚤 제멋대로인 글자 예뻐 보였다.  


2018년 봄부터 초겨울까지 나는 초등학교 '첫걸음 지원' 강사로 일했다. 매일 국어, 수학 시간에 들어가 학습 부진 학생들을 돕는 일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주연이고 나는 대사도 별로 없는 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능한 티 나지 않게 아이들과 담임선생님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아이들 주변을 맴도는 일이 어색하기만 했다. 


칠판 앞이 아니라 아이들 옆에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고 하루 두세 시간을 보냈다. 예전에 앞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수업에 집중하며 척척 대답하고 발표 잘하는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선생님 어려워요'하는 답답한 표정의 아이들, 집중하지 못하고 딴짓하는 아이들만 눈에 띄었다. '저 녀석 두 자릿수 계산은 손을 놓고 있구나. 이 녀석은 맞춤법이 엉망이네!' 아이들마다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왔다.


낙서를 하거나 자주 공상에 빠지는 윤규는 가만히 어깨를 잡아주거나 수업 중인 페이지를 짚어주었다. 다른 아이를 봐주는 사이, 바로 딴짓하기 일쑤인 윤규가 담임선생님께 야단을 들으면 혼나는 아이처럼 내 얼굴도 빨개졌다. 한글이 서툰 준이는 국어 시간 내내 곁을 지켜야 했다. 쓰기 느려서 쉬는 시간까지 써야 하는 날도 많았지만 받아쓰기 20점 30점 맞다가 70점, 80점 맞은 날엔  내가 더 신이 났다.


조금 일찍 출근해서 아이들과 아침 독서 시간에 함께 책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학급 도서가 많지 않아 집에 있는 책을 가져가서 빌려주었더니 아홉 살 어린 친구들이 내게 동화책을 추천했다.

"선생님, <자장면 불어요> 엄청 재밌어요. 꼭 읽어보세요."


매일 숙제 검사를 하다 보니 금세 반 아이들 이름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이름을 잊어버리거나 헷갈리지 않으려고 다른 정보를 함께 기억했다. 가영이, 가은이는 쌍둥이인데 가영이만 안경을. 가장 먼저 내게 달려와 자기 이름을 알려준 아이는 파마를 한 보성이, 덩치도 키도 나만 해서 2학년이 맞냐고 확인한 녀석은 혁이. 수학을 어려워해서 수학 시간에는 자기 옆에만 있어 달라는 긴 머리 유나. 이름을 기억하고 매일매일 불러주니 아이들 모두와 가까워졌다.


친해지자 한 명 한 명 전과 다른 모습일 때 마음이 쓰였다. 조잘조잘 잘 떠드는 슬기가 조용하면 뭔가에 삐져있다는 걸, 자주 배가 아프다고 지각하는 연희는 친한 친구가 반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슬기야, 연희야,  운동장 산책하고 오자."

쉬는 시간에 운동장 반 바퀴만 걷다 와도 아이들은 금방 헤헤 웃었고, 아프다는 말도 쏙  들어갔다.


어느 날, 집에 돌아가려고 가방을 챙기는데 아이들이 인사하러 다가왔다.

"선생님, 벌써 가는 거예요? 우리랑 같이 급식 먹고 가요."

"선생님도 그러고 싶지만 규정상 외부인이라 먹을 수 없어."

"외부인이 뭐예요?"

"학교 직원이나 학생이 아닌 사람"

"선생님은 우리 가르치는데 왜 학교 직원이 아니에요?"

특수 계약직 노동자를 아이들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 서둘러 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왔다. 역시 나는 학교의 외부인, 비중 없는 조연이구나 조금 씁쓸했다.


여름방학식 날, 담임선생님은 떡볶이 파티 준비하느라 교무실에 가셨고, 아이들은 왁자지껄 모두 흥분 상태였다.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준비해 온 간식 자랑을 듣느라 혼이 빠져있는데 누군가 외쳤다.

"선생님, 성태랑 민수랑 싸워요."

"멈춰!"

나도 모르게 비명처럼 외쳤다. 큰 소리에 놀라 치고받고 싸우던 아이들이 멈췄다. 내 심장도 멈춘 것 같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다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크게 상했다. 1학기를 잘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마지막 날 다 망친 느낌이었고 담임선생님 얼굴을 보기 민망했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있어서 그나마 아이들이 다치지 않은 거라고 달래셨지만 여름방학 내내 잊지 못하고 마음이 쓰였다.


종업식 날 싸웠던 성태는 편지에 선생님 때문에 자기가 다치지 않았다고 정말 고맙다고 썼다. 성태의 글을 읽고 나자 '나도 2학년 2반의 주연이었던 적이 있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매일매일 주연과 조연이 바뀌는 생활이었다. 2학년 2반에 들어오는 모든 선생님과 아이들이 주연이 되기도 조연이 되기도 하는 거였다. 열여덟 명의 아이들과  여러 선생님들이 모두 주인공인 동화를 언젠가 써보고 싶다.


정세랑 작가는 나랑 비슷한 생각을 먼저 했다. 모든 퍼즐 조각처럼 모두가 주인공이거나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피프티 피플>에서 정세랑 작가는 50명이 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림과 색이 명확한 조각이든 구석에 끼우는 희미한 조각이든 모두 제자리와 역할이 있다. 거대한 퍼즐판 같은 사회에서 각자 자리를 지키고 역할을 다해야 사회는 안정이 된다. 한 조각이라도 없으 금방 흩어지기 쉽고  영원히 완성될 수도 없다.


TV 뉴스로 고층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크레인 기사님이 사람들을 구한 장면을 보았다. <피프티 피플>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되어 가슴을 쓸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 목소리는 작아도 자신의 역할을 야무지게 해내는 사람들 모두 주인공이 아닐 수 없다.













이전 08화 변기를 닦으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