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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툰자 May 26. 2021

한 평도 빼앗긴 땅은 없다

  《토지》





토지 사업 관련 이야기는 아니다. 국토부나 LH공사 직원들의 에 대해 TV 모니터에 침이 튈 정도로 분노했을 뿐이다.  사촌이 배 아파할  내  땅 얘기도 아니다. 아쉽지만 내 이름으로 된 토지는 아직 지구 상에 한 평도 없다.


코로나19가 만 1년이 될 즈음 너무 지쳐 있었다. 고립감, 외로움, 경제적인 불안까지  그때  대하소설 <토지>가 생각났다. 사실 블로그 이웃이 <토지> 필사를 마쳤다길래 깜짝 놀라서 필사는커녕  한 권도 읽어본 적 없는 대작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어렸을 때 TV 드라마로  토지를 본 기억은 있으나 남아 있는 것은 몇 장면에 불과하다. 고난의 일제강점기를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견뎠는지 들여다보고 지금을 견딜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었다.  2021년 첫 번째 목표를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완독으로 결정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한 달에 4권 정도 읽기로 했다. 후루룩 빨리 읽으면 놓치는 부분이 많고 게으르게 읽다가는 중도 포기의 위험이 생기니까. 사이사이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 나온 소설이나 에세이도 읽었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20권까지 달릴 수 있을 테니까. 마라톤을 끝내고 나면 필사할 엄두가 날 것 같지 않아 한 권을 마칠 때마다 읽으면서 밑줄 그은 문장들을 초록했다.  오는 겨울에 시작해서 벚꽃이 지는 무렵에  끝마쳤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성종 때 오랜 가뭄으로 백성들이 힘들자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였는지 '행운의 편지'퍼졌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학창 시절 유행했던 행운의 편지와 비슷한 내용이 들어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암담한 시절, 종이와 글자로라도 서로 위안을 주고 부적처럼 간직하며 효력을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비슷한 심정으로  위험하고 팍팍한 세상에서 나를 구원해 줄  안전한 소설 속으로 숨어든 것이다.


소설 <토지>에서 나는 무엇을 얻었나? 대단한 지혜들을 모아 현실을 타파하고 앞으로 나갈 힘을 얻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거기서 나처럼 흔들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참고 견디고 그러다가 밟히면 벌떡 일어나 싸우기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시절이었지만 사람 냄새가 진하게 났다. 누런 종이 냄새와 종이 위 사람 냄새를 맡으며 지난 4개월 그런대로 잘 버텼다.


10여 년 전에는 내  이름으로 된 아파트 하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오늘은 서울 사는 친구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소식에 배가 살살 아프다. 내가 아파트 하나 마련하는 동안 지인은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다.  나는 도대체 뭐하고 살았나 한탄하다가 모두 빼앗기고 억울했던 <토지>의 민중들을 생각하며   배를 문질렀다. 나는 한 평도 빼앗긴 땅은 없으니까  그런대로 살 만하지 않은가.


읽는 동안 지리산 주변부터  일본, 중국과 러시아 땅까지 떠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마을과 자연 속으로 진짜  가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마지막 한 권을 남겨둔 어느 일요일,   지리산 산동마을  다녀왔다. 다음에는 진주,  통영, 하동에도 들러야겠다. 내 땅은 아니어도 조상들이 지켜낸 너른 들을 최서희처럼 당당하게, 느긋한 마음으로 둘러봐야지. 우리의 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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