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바탕 위에 주홍색 홍시 그림이 있는 책을 선물 받았다. 화사한 표지를 넘기니 내 이름과 김설원 작가의 사인이 있다. <내게는 홍시뿐이야>는 군산이 고향인 작가가 군산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로 12회 창비 장편소설상을 받았고, 금의환향하여 동네책방에서 강연도 했다. 강연에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 마냥 선물해 준 이가 홍시처럼 예뻤다.
식탁에 앉아서 처음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저녁밥 지을 시간이 가까워지자 조금 더, 몇 장만 더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 속도가 붙었다. 내가 살고 있는 군산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 그런지 꽉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주인공 아란의 엄마가 홍시를 탐하듯이 훅훅 책장을 넘겼다.
곁에 있던 피붙이라고는 엄마뿐이었는데, 엄마마저 열여덟의 아란을 떠났다. 엄마가 아란을 부탁한 집에서 잠깐 얹혀살긴 했지만 그 집 사정도 나빠져 떠나야만 했다. 자퇴한 아란은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셋집을 얻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아르바이트하는 치킨집 사장님에게 아란은 치킨홍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치킨홍은 지적장애 3급인 이복동생, 양보와 함께 산다. 식물인간이 된 외삼촌과 베트남의 친정에 간 외숙모 대신 사촌동생, 첸을 돌보고 있다. 아란까지 보듬는 치킨홍은 엄마를 잃은 세 사람의 엄마 같다.
아란이 싼 값에 들어간 셋집 안채에는 세 모녀가 살고 있는데 한 덩어리처럼 셋이서 꼭 함께 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송사리 떼 같다. 작고 약해서 함께 모여 살아내는 생명들.
장애를 가진 양보는 어리숙하지만 치킨 배달을 돕고, 엄마에게 베트남어를 배운 첸은 아란에게 베트남 동화를 해석해 준다. 안채의 모녀도 아란을 불러 빵과 커피를 대접한다. 그렇게 서로서로를 구제한다.
피붙이가 아니어도 서로에게 구원의 천사가 될 수 있다. 지금 아란의 곁에 엄마는 없지만 혼자는 아니다. 치킨 가게의 세 남매도 있고, 세 들어 사는 집이지만 세 모녀도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아란의 방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홍시가 스물일곱 개나 쌓여 있다.
우리를 구제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무섭지 않도록, 외롭지 않도록 홍시가 아란을 구제하듯이 나를 구제한 것은 소설이었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건강하지 않은 둘째를 낳고 나는 무서웠다. 남편과 아이들이 곁에 있어도 외로웠다. 밥보다 잠이 더 고픈 육아 시절에도 아기가 잠든 밤마다 두려운 현실을 피해 허구의 세계로 숨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터에 있는 주인공을 만나면 나를 위로했다. '여기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는 아니잖아. 이 정도면 살 만하지 않니?' 씩씩하고 당당한 여자들의 이야기는 힘이 되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좀 단단한 사람이 되어 보자' 그랬다. 현실 속에서 들려오는 조언과 걱정보다 허구의 세계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를 다독였다. 어떤 날은 실컷 울게 해서 답답했던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주었고, 어떤 날은 실실 웃게 해서 찡그렸던 얼굴을 펴주었다.
군산은 몇 개 있던 대기업들 철수로 몇 년 전부터 경제 위기 지역이다.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많다. 게다가 코로나 19로 전 세계의 경기가 불안정하니 걱정이 크다. 드넓은 바다의 작은 물고기들이 거대한 물고기의 밥이 되지 않기 위해 떼로 몰려다니듯이 흩어지지 말고 서로서로를 구제해야겠다.
***여운이 남아 소설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엮어봤다.
홍시라도 괜찮아
닭곰탕, 달걀찜, 시래기 무침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배불리 먹여놓고
엄마가 하는 말이
"당분간 또와 아저씨 집에서 지내야겠어."
"우리가?"
"아니, 니가."
치킨, 맥주, 황금붕어빵
원목 테이블에 차려놓고
또와 아저씨 부인이 하는 말이
"야, 이 나이에 소똥 치우러 가는 신세보다야 니 신세가 낫지 않겠냐?"
치킨, 콜라, 무, 양념소스
튀기고, 포장하고
치킨홍이 하는 말이
"동화에서는 호랑이가 엄마를 해치지만 현실에서는 불황이 우리를 잡아먹어."
홍시 스물일곱 개
일부러, 무심코 샀던 홍시가 소쿠리 한가득
터진 홍시의 달달한 냄새를 맡은 아란이 하는 말이
"백 개를 채워볼까. 이백 개도 좋지. 그럼 나는 홍시랑 살겠네. 홍시라도 괜찮아."